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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시 Feb 29. 2024

초련

너와 나의 연애를 응원하는 건 여름밖에 없는 것 같아

"11일 일본을 지날 것으로 예상되던 태풍 '초련'이 북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밤부터 전국에 강한 비바람이 예상되오니 외출하실 때는 우산-"
 갑자기 하늘이 우중충하게 변하더니, 태풍이 우리나라를 지나게 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뉴스를 챙겨보는 편이 아니어서 태풍 북상 소식을 늦게 들었다. '초련'. 이번 태풍의 이름은 첫사랑인가 보다. 태풍의 이름치곤 퍽 사랑스러웠다. 잠잠하고 부드럽게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었을까, 그러면 아주 안 된 일인데. 어떻게 첫사랑이 잠잠하고 부드러울 수가 있을까, 여기저기 헤집고 요동치고 하나쯤은 엉망으로 만들어야 그게 첫사랑인 걸 텐데. 태풍은 첫사랑이 될 수 없지만 어떤 면에서 첫사랑은 태풍이 될 수 있다.


 마음속으로 그 이름을 비웃자, 마치 하늘이 콧방귀 뀌듯 갑자기 강한 바람이 들이닥쳤다.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을 밀어 닫고 커튼을 쳤다. 이제 바람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던 참견하지 못한다. 아주 부끄러운 생각도, 오래된 추억 회상도 이제 바람은 들을 수 없다.
그래, 첫사랑. 이런 우중충한 날에 생각하기 딱 좋은 주제다. 첫사랑은 무엇인가. 첫 연애 감정인가? 어디까지 깊어야 첫'사랑'인 것인가. 난 첫사랑이 있었나?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아이였을 때에도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다. 마음을 전하고 서로를 좋아한다는 걸 인지한 상태로 지낸 적도 있었다. 그게 첫사랑 일까? 하지만 이런 밋밋한 얘기 말고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내  첫사랑이지, 하고 명확히 머릿속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첫사랑이지 않을까. 그리고 내게도 그런 의미의 첫사랑은 있었다.

우리는 사랑받지 못하는 연인이었다. 사랑을 주고받는, 연애 감정을 나누는 게 좋아서, 서로의 '유일한'이라는 칸에 이름을 새겨 넣고 싶어서, 그리고 친구로서는 발휘하지 못할 소유욕에 이름 붙이고 싶어서 시작한 연애였다. 그런데 남들은 왜 이렇게 우리에게 관심이 많은지.

재작년 여름, 토요일.
구름이 잔뜩 낀 회색 하늘, 날은 덥고 바람은 습기를 가득 머금었다. 흰 이불과 열린 창문과 세차게 달리는 바람 소리가 오늘과 꼭 닮았고 다른 점은 나의 첫사랑이 옆에 있었다는 것.

"너와 나의 연애를 응원하는 건 여름밖에 없는 것 같아."
내 품엔 희고 부드러운 이불에 싸여있는 연인이 있다. 그는 내게 몸을 완전히 맡긴 채 조용히 말했다.
"아무도 우리가 연애하는 걸 바라지 않아."
그렇다면 여름은 우릴 왜 우리를 응원하는 걸까, 그런 우울한 이야기라면 겨울이 더 어울릴 텐데.
"여름은 낮이 길어서 우리가 조금 더 건전해 보이게 해. 조금 더 서로를 붙잡을 수 있게 해 줘. 묵묵히 다정하게. 아무도 우리를 위해 그러지 않는데 말이야."
거센 바람 소리만 창틀을 흔들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우리가 언제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아마 영원은 아니겠지. 그래 영원은 아니겠지. 그가 맞장구쳤다.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만히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름에 헤어져야 해. 여름은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길게, 강하게 비를 내릴 테니까. 오랜 장마에 서로의 발길을 묶어줄 거야. 여름만은 해줄 수 있을 거야."
 그와 나는 사랑을 얘기할 때면 언제나 그런 이별을 생각했다. 서로가 첫사랑인데 언제나 애달팠다. 그때 우리의 연애를 옆에서 지켜본 이들은 우리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완전히 상반된 우리 둘을 가지고 이상한 망상을 했다. 우린 학교가 끝나면 손을 잡고 하교했고 비가 오는 날은 우산을 가지고 서로를 데리러 갔다. 우울할 때나 상대가 너무 좋아질 때 갑자기 안을 수 있었고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밤늦게 음악을 들으며 산책하기도 했다. 집이 빌 때면 함께 이불 속에 들어가 영화를 보기도 했다. 여느 연인처럼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선 키스도 해봤고 서로의 동의 아래 더한 짓을 할 수도, 끝없이 맹목적이어질수도 있었다. 그렇게 아릿한 사랑을 해도 헤어질 땐, 우리는 항상 울면서 헤어졌다. 금방이라도 우린 이게 마지막이 될 것 같아서. 내일도 보고 그 모레도 볼 텐데 헤어질 때면 눈물이 났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우리의 사랑을 동감해 주지 않았다. 우린 연인이었지만 남들의 이해를 받을 수 있는 연인은 아니었다. 혹시나 너무 달아오르다가 빨리 꺼져버릴까 애지중지하던 우리의 사랑은 적당히 사회에 맞춰 헤어졌다. 이별을 고하던 날엔 비가 왔다. 차마 문을 열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가 우리의 발길을 잡았다. 결국 우리가 헤어진 건 며칠이 더 지나서였다. 여름날 발목까지 물이 잠긴 장마의 마지막 날에.

여름은 언제나 미화되어 왔다. 덥고 습했던 그해 여름처럼 내 첫사랑도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는 내 첫사랑이었고 그와 헤어진 이후의 여름은 내게 큰 통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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