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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쟈스민 Jan 05. 2022

학교폭력 멈춰! 멈춰! 멈춰!

사카모토입니다만?

작년 출근길이었다. 주차장을 벗어나 교문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아이들이 구호 같은 걸 외치는 게 느껴졌다. 호기심에 교문 쪽으로 걸어가며 보니 아이들과 창체 기획 샘이 한 줄로 서서 피켓을 들고 외치고 있었다.

‘스마트폰 중독 멈춰!’

창체부에서 하는 캠페인인 것 같았는데 너무 재밌었다.


그렇게 짜릿한 출근을 하며 멈춰라는 구호가 계속 생각났다. 무슨 수능 금지곡만큼이나 중독성 있었는데 평소 동갑에 친한 창체 기획 샘을 복도에서 마두 치자 물어봤다.

“샘! 멈춰! 이거 샘이 만든 구호예요?”

“아니. 아니. 이거 유명하잖아요!”

그때 알게 되었다. ‘학교폭력 멈춰’라는 말이 엄청 유명하다는 사실을.


이 말을 하면 진짜 아이들이 학교폭력을 멈추는 걸까. 근데 이런 말도 필요 없게 만드는 학생이 있다. 학교폭력은 고사하고 이 학생만 있으면 모두가 얌전한 모범생이 될 수 있는데, 그의 이름은 바로 사카모토다!

세 번째 손가락으로 안경을 올리는 게 킬링 포인트.



사노 나미라는 작가의 데뷔작, 만화 '사카모토입니다만?'의 주인공 사카모토는 볼수록 사기 캐릭터다. 솔직히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인간으로 그는 사람이 할 수 없는 불가능한 모든 일을 해낸다. 청소, 등교, 식사, 교우관계 모든 면에서 평범함을 거부한다.

당번일을 하고 있는 사카모토와 그의 평범한 점심시간.
사카모토의 등교

하나하나 모든 행동이 저 세상 스타일과 완벽함으로 이루어진 이 친구는 당연히 모든 여자아이들의 우상이다. 하지만 남학생들은 시기 질투하기도 한다. 특히 소위 일진이라 불리는 남자아이들은 사카모토를 괴롭히려 하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사카모토는 이 집단 따돌림까지 오히려 좋아하며 일진들을 참 교육해준다. 일진들은 결국 그의 비인간적인 완벽함에 무릎 꿇고 사카모토의 팬이 되어버린다. 사카모토에 대한 동경과 사랑은 사람을 뛰어넘어 동물에게까지 이르는데 동물마저 사카모토를 쫓아다닐 지경이다. 이 못 말리는 완벽남 사카모토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가? 사카모토는 존재 그 자체로 완벽함이자 어이없음이다. 그래서 '사카모토입니다만?'이라는 제목 하나로 다 설명된다.


사카모토를 노리는 일진들.          의자 빼기 당하지 않는다.
물뿌리기는 사카모토에게 운치 있는 소나기일 뿐.
고통받는 일진들.
사카모토 덕에 목숨을 건진 일진들은 결국 사카모토를 폰 배경화면으로 하며 팬이 되어버린다.


이 만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사카모토 같은 캐릭터가 현실에도 있었으면 했다.


사실 나는 학교폭력이라면 치가 떨리는 사람이다. 이상하게도 폭력적이거나 반 친구들을 선동하여 힘의 논리를 묘하게 이용하는 아이들을 보면 알레르기 반응이 생긴다.


그건 내가 교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도 학교폭력의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나는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왕따 당하며 버텨왔다. 제일 중요하고 재밌어야 할 유년시절 6년은 내게 인내와 고통의 시간이었다.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자세히 말하고 싶진 않지만 물리적 폭력보다 정신적 폭력이 더 아플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도망치지는 않았다. 지나친 자존심으로 도망 따위는 절대 치지 않겠다며 오기로 날 괴롭히던 아이들이 고스란히 있는 여고에 진학해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살기 위해 도망칠 필요도 있었는데.


내가 사카모토였다면 가뿐하게 일진들을 참 교육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주류에게 미움받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무능해지는 것이다. 일진들에게 미움받지 않으려면, 그리고 주류에 들려면 한 사람을 집단 따돌림해야 한다. 그게 그 당시 날 괴롭히고 외면하던 전교생의 심리. 졸업하던 날 나는 쾌재를 불렀다. 쇼생크 탈출이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서른이 되기 전인 20대까지는 악몽에 시달렸다. 학교에서 괴롭힘 당하던 내 모습이 꿈에 나오면 식은땀을 흘리며 한밤중에 멍하게 앉아있는 일이 많았다. 학교가 무서워 여자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던 교대, 사범대는 굳이 가지 않겠다며 결국 영문학과를 선택했다. 나는 권선징악을 믿었는데 대학교 진학 때 보니 과연 권선징악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날 괴롭히던 주모자 중 한 명은 부모님 덕에 좋은 대학, 좋은 학과에 진학했고 다른 한 명은 평소 공부를 잘하던 터라 교대에 진학했다. 학교폭력 관련 드라마를 보면 나쁜 짓을 하는 애들이 꼭 든든한 배경과 좋은 머리로 잘 빠져나가는데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대학교에 진학하니 혼자가 편해진 내게 오히려 동기들이 다가와주었다. 그리고 내 유년시절을 모두 보상받을 만큼 행복한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교수님들의 강력한 권고로 교직이수를 하게 되었는데 피하고 싶었던 학교로 갈 수밖에 없는 내 운명이 신기했다. 대학에서 수업을 들을 땐 교육학 공부가 꽤 재밌어서 교직 이수를 잘했다고 좋아했지만 문제는 교생실습이었다.  


대학교 4학년이 되면 모든 예비 교사들은 교생실습을 한다. 집 앞 여중으로 실습할 학교를 배정받은 나는 학교 앞에서 다리를 후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나도 여중, 여고를 나왔는데 옛날의 그때가 떠올랐다. 지나가며 날보고 반갑게 인사해주는 여학생들마저 무섭게 느껴졌다.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거리는데 한 선생님이 말을 걸어왔다. 그 사람은 알고 보니 나처럼 같은 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하러 온 수학과 교생이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절친이 되었고 10년 가까이 지금까지도 친구로 잘 지내고 있다. 그 동료와 함께 나는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었고 학교를 배워나갔다. 교생실습 마지막 날, 나를 안고 엉엉 울던 여중생들은 지금 다 커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날 잊었겠지만 난 그 아이들 덕분에 교사가 될 수 있었다. 더 이상 내게 학생은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사랑해 줄 존재가 된 것이다.


학생들에게 받은 상처를 학생들로부터 치유받은 것은 역설이다. 고마운 역설. 나에겐, 나를 안고 "선생님. 가지 마세요."라고 울어준  학생들이 따듯하고 완벽한 ‘사카모토같은 존재이다.  뒤로 나는 모두를 용서하기로 했다.


 가장 괴롭혔던 아이는 지금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우습게도 서로 교사가 되어   마두  적이 있었는데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쩌면  친구는 자신이  괴롭혔다는 자각조차 없을 수도 있다. 어른이 된다는  쉽게 용서한다는 것일지모르겠다. 나는 나의 사카모토들을 떠올리며 교사가   친구를 미소로 바라봐주었다.


'그래. 저 애도 어렸을 때니까. 지금이라도 아이들에게 봉사하고 좋은 선생님이 돼라.'라고.


물방울 놀이로 일진 친구들 금연시켜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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