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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농 Apr 21. 2024

튤립 알뿌리는 기다림이다

 <무민의 단짝 친구> 그림책과  튤립 알뿌리 관찰 그림

토베 얀손의 무민 시리즈 중에 <무민의 단짝 친구>란 책이 있다. 화훼단지에서 튤립 모종 다섯 개를 사 와 교실 창가에 두었는데, 구경 온 옆반 샘 ‘나무’가 다음 날, 이 책을 건네주었다.   

튤립 모종은 서서히 자라  줄기를 세우고, 빨간 꽃, 노란 꽃, 보라 꽃을 피워내더니, 약 2주 간의 절정을 보내고 다시 시들어갔다. 그 과정 또한 지켜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아, 화분을 정리하지 않았다. <무민의 단짝 친구> 그림책도 오랫동안 내 책상 위 그대로 놓아두었다.


언제쯤 아이들과 수업을 해야 할까?

때를 기다렸다.  

꽃잎은 다 떨어졌고, 줄기도, 잎도 다 말라갔다.  

드디어 때가 왔나보다.

바로 황금 알뿌리를 드러낼 시간.


이 책을 받고 처음 읽어보았을 때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1학년 아이들과 함께 읽어보니, 달랐다. 나도 빠져들고, 아이들도 빠져든다. 가을이 되자 홀로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 친구 스너프킨을 지켜보는 게 무민은 힘들다. 결국 친구를 떠내 보내며, 집에 돌아오니 무민 엄마가 마당 화단에 튤립 알뿌리를 심고 있었다.


엄마, 튤립은 따뜻한 걸 좋아하는데 왜 지금처럼  추울 때 심어요?

튤립한테 겨울을 확실하게 가르쳐 주지 않으면 봄이 와도 모를 수 있잖아.
지금부터 심어서 땅 속에서 겨울을 나야 예쁜 튤립이 핀단다.


         <무민의  단짝 친구, 토베 얀손, 어린이작가정신> 중에서


책을 덮고, 아이들에게 물어봤다.

“선생님이 왜 이 책을 읽어줬을까? 맞춰봐. 두 가지 이유 때문이야.”

“친구와 친하게 지내라고.”

“친구를 소중히 여기라고? “

1학년 아이들답게 비슷한 내용의 답을 계속 말한다. 낱말 한두 개만 바꾸고서 대답이 맴돈다. 친구. 우정. 소중히. 친하게.

“그래, 한 가지는 맞췄어. 또?


그 틈 사이를 뚫고 나오는 목소리.

기다리는 법을 배우라고요!

 

우리 반 철학자, 승민이다. 지난 3월, <봄> 하면 떠오르는 낱말을 얘기해 보는 시간에, 승민이가 그랬다.

“봄 하면  <할머니집>이 생각나요. 따뜻하니까. "

이번에도 또 내 마음을 친다. 쿵.


이제, 관찰 그리기 시간. 한 모둠에 하나씩, 알뿌리를 나누어주었다.


"알에서 깨어나는 것 같아요."


소연이가 한 말은 시 같다.

"쓸 수 있다면, 그 말도 적어줄래?"

"선생님, 뾰족한 게 조그맣게 튀어나왔어요."


관찰력 대장 유연이가 말했다. 급식실 갈 때마다 떼 지어 가는 개미들을 보느라, 자기는 정작 줄을 놓치곤 하는 유연이.


"그래. 관찰하고 그린다는 건 중요한 공부야. 내 눈앞에 있는 것을 자세히 이리저리 살펴보고, 뇌에 전달시켜 생각하고, 다시 손으로 내려와 똑같이 그려내는 것. 우린 그걸 공부하는 거야."

"그러니까! 똑같이 그려야 돼!"

나의 엄포에 유찬이가 엄살을 떤다.

"이걸 어떻게 그려요. 어려워요. 어려워. 아이 진짜."


왁자지껄한 1학년 교실에도 침묵이 흐른다. 바삐 움직이는 손, 하나씩 색으로 채워지는 종합장.


"선생님, 다 그렸어요. 이건 튤립이 시든 거고, 이건 튤립이 꽃핀 거예요."

지형이가 칠판 앞으로 나와 종합장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러더니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알뿌리 하나를 더 그려 넣는다. 다시 나와 내게 말했다.

"선생님, 제 손에 튤립꽃잎이 있어요."

"상처 난 거야?"

"아니요. 사인펜인데요."

"어머나, 지형이가 그린 거야?"

1학년 선생님답게 잔뜩 감정을 실어 물어보았다.  

"아니요. 그려진 건데요."

경상도 사나이같이 무심코 뱉는 답말.

 


 다음 주에 아이들과 함께 학교 교단에 나가 흙을 깊이 파고 이 알뿌리들을 심을 것이다. 그리고 얘기할 거다.


"얘들아. 이 튤립 알뿌리들이 너희들 2학년이 되길 기다린대.
 내년 봄, 이 튤립들이 다시 필 거야.
그때 우리 지금을 기억하자.
약속할 수 있지?"



* 반 아이들 이름은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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