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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농 May 01. 2024

씨감자야, 씨잠자

<두더지의 감자> 그림책과 씨감자 그리기, 심기

# 2024. 3. 4.

학교 본관 앞, 열두 개 상자 텃밭이 가로로 길게 늘어뜨려 있었다. 건강해 보이는 검은흙 상자도 있고, 더 이상 빨아먹을 영양분이 일도 없어 보이는 푸석푸석한 흙 상자도 있었다. 작년에 심은듯한 작물 가지들이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상자도 있었다. 생명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한 상자만이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2년 살이인, 딸기 모종이었다.  겨울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 초록 잎을 내보이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흰 딸기꽃도 몇 송이 보였다.


노지 텃밭이라면, 추운 겨울이라도 텃밭 경관을 빛내줄 청보리, 양파, 마늘 등의 작물을 심을 수 있지만, 상자 텃밭은 그러기 힘들다. 4월~10월의 푸르름이 지나가면, 11월~3월은 폐허의 공간이 된다. 갈무리를 잘해놓고, 내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아이들이 직접 그린 그림이 가득한 비닐 덮개를 씌워놓는다면, 상황이 더 좋아질 수도 있겠지만…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자꾸 정리를 하려 하는 학교 관리자들을 만나곤 한다. 텃밭을 없애고 그곳을 주차장으로 바꾸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고, 미관상 좋지 않다며 상자 텃밭들을 얼른 치우려 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올해 만난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도 그런 분이신 듯했다. 곧 텃밭 상자들을 다 갖다 버리신다고 했다. 아이들은 예쁘고 건강한 것들만 보고 자라야 하는 건가? 노자 <도덕경> 11장을 보면, 다음 글이 나온다.


서른 개의 바큇살이 바퀴통으로 모여듦에
바퀴통의 빈 곳에 그 쓰임이 있다.
찰흙을 구워 그릇을 만듦에
그릇의 빈 공간에 그 쓰임이 있다.
문과 창을 내서 방을 만듦에
방의 빈 공간에 그 쓰임이 있다.
그러므로 유가 이로울 수 있는 것은
무로 쓰임을 삼기 때문이다.
                                                                   _ 노자, 이석명, 민음사, 122p


유가 이로울 수 있는 것은 무로 쓰임을 삼기 때문이다…

텃밭에 생명이 자랄 수 있는 것은, 죽음을 통과하는 긴 침묵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 2024. 3. 17.

열두 개 상자 텃밭을 찬찬히 살펴보고, 가장 좋아 보이는 상자 몇 개를 골랐다. 주말 하훼시장에 가서 사 온 지렁이 흙과 부숙토와 계분으로 흙을 만들어 담았다. 발효를 위해 일주일을 더 기다렸다.


얘들아. 이제 일어나.
침묵의 시간은 끝났어.
이제 생명의 시간이야.
감자를 심어줄게.
감자를.



# 2024. 3. 25.

준비한 그림책 <두더지의 감자>를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다.

아가씨에게 보여줄 보물을 찾기 위해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땅을 파는 두더지들. 어떤 두더지는 황금을, 어떤 두더지는 석유를. 포기하지 않고 매일매일 열심히 땅을 판 주인공 두더지도 드디어 찾아낸다. 나만의 보물, 작은 감자 한 알. 그러나 이미 다른 두더지들이 준비한 오색오감으로 마음을 잃은 아가씨는 작은 감자 한 알 가져온 주인공 두더지에게 거침없는 실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무럭무럭 커가는 감자 한 알. 주인공 두더지의 마음속 꿈도 자란다. 더 크게. 더 단단하게.  


이제는 관찰 그리기 시간. 준비한 씨감자 한 개씩을 모둠 책상에 올려주었다. 아이들은 관찰한 그대로 그리기도 하고, 두더지와 함께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했다.

<씨감자>를 <씨잠자>로 잘못 썼어요.


칠판에 적힌 글씨를 잘못 적은 재이가 멋쩍어하며 말했다. 그러자 재이 자리로 아이들이 몰려든다.

“어디, 어디?”

“좀 보자. 진짜네.”

“씨잠자? 씨감자가 잠자는 거야?”

“하하하.”


"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씨감자가 자고 있으니까 이불 덮어줬어요."

책상이 더러워질까 봐 종이를 깔아주었는데, 지형이가 어느새 이불을 만들어주었다.


밖에 나가 아이들과 함께 감자를 심었다. 서로 하겠다고 싸우는 아이들을 한 켠으로 줄을 세웠다. 한 명이 한 번씩 모종삽으로 흙을 퍼냈다. 손 한 뼘만큼  깊어진 곳에 씨감자를 고이 재웠다. 그리고 다시 한 명이 한 번씩 모종삽으로 흙을 덮었다. 흙이불이 되었다.   



매일매일 아이들과 급식실 갈 때마다 상자 텃밭 앞에서  인사를 했다. 그 사이 들고양이들이 흙을 헤집어 놓기도 했다. 계분 냄새가 고양이들도 불러들인 것 같았다. 그 사이 상자 텃밭을 도둑맞기도 했다. 감자가 심긴 것을 모르는 어떤 선생님이 상자를 옮겨놓기도 했다. 어렵게 다시 찾긴 했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상자 텃밭은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 2024. 4. 16.

드디어, 드디어 나왔다.

감자싹이 텄다.

아주 자그마한 싹인데, 용감하게 흙을 뚫고 세상에 나왔다.

해마다 겪는 일인데, 늘 처음처럼 경이롭다.

꼭 3주 만이다.


오고 가며, 우리 반 상자텃밭에  다른 반 아이들이 인사를 한다.

다른 학년 아이들도 인사를 한다.

선생님들도.

몇일 전에는 교장선생님까지도.


무럭무럭 크렴, 감자야.

더 크고, 더 단단하게.


* 그림책 인용 <두더지의 감자, 숑레이, 리틀씨앤톡>  

* 아이들 이름은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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