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시인의 <가려진 시>
내일이면 나는 <2025 유예상식 프로젝트>의 다음 장을 열어야 한다.
바로 교실, 교실마다 방문해 선생님들께 설문에 응해달라 부탁드리는 것.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감사히, 때론 기꺼이 해주시겠지.
그런데, 마흔 다섯 가운데 아홉... 그들의 교실에 들어가는 것을 상상해 보니 싫다.
정말 싫다.
<2025 유예상식 프로젝트>
내가 붙인 이름.
하기 싫은, 그러나 꼭 해야 하는 일을 할 때 스스로 그 일에 이름을 붙인다.
그 시작은 이렇다.
지난 2025년 2월.
그건 선생님 생각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그건 선생님 생각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아닌데요, 교감 선생님.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저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아닌데요?"
"그럼 그게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교사가 아니면 조금 어려울 수 있는 얘기를 간단히 해보자면,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학교는 복지거점학교이다.
서울시교육청은 복지거점학교에 교사 전보 시 전체 교사의 20%까지 유예, 초빙교사를 남길 수 있는 혜택을 주었다.
쉽게 말해, 교사들은 5년마다 학교를 옮겨야 하는데, 20%는 학교의 힘든 일 맡아하라고, 기존 학교에 남게 해 준다는 얘기.
학생들의 복지, 기초학력, 생활지도가 열악한 지역에 위치한 학교의 복합적인 환경 요소들을 고려해 학교의 인사, 업무 운영의 연속성,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서울시교육청이 마련한 제도.
그 제도의 취지가 올해 우리 학교에 실현되지 않았다. 보통 학교마다 교무부장, 연구부장, 생활인성부장(학교폭력담당), 6학년부장이 유예를 한다. 상대적으로 힘든 업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 우리 학교는 유예하는 부장들이 상대적으로 편한 학년부장에 들어갔다. 대신 학교폭력업무, 기초학력업무 등 3D 업무를 일반 담임교사에게 떠넘겼다. 업무분장 조정에 관한 단 한 차례의 교직원 회의도 없이 학교 관리자 분들이 결정을 내렸다.
2025 업무분장 발표 후, 학교 분위기가 술렁였다.
교감 선생님께 가서 이번 인사 문제점을 말씀드렸다. 조금 흥분했다.
그분 역시 언성을 높이셨다.
그건 선생님 생각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나는 올해 우리 학교 인사자문위원이다.
우리 학교 전교조 분회장이기도 하다.
그러니 더더욱 모든 선생님들의 생각들을 파악해야 한다.
올해 전보 유예에 관한 인사자문회의는 작년에도 그랬듯이10월에 열릴 것이다.
그래서 시작했다.
<2025 유예상식 프로젝트>
첫 번째 장은 설문지를 만드는 일.
윗 분들에게는 책잡히지 않을,
동료들에게는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그리고 앞으로 함께 바꿔나갈 수 있는 힘을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불어넣어 줄,
설문지.
설문지를 음식에 비유해 본다.
요리 재료는
작년 한 해 겪었던 학교 내 부조리한 문제,
2월 말, 교감선생님과의 대화,
챗GPT.
요리 도구는
canva,
노트북.
모든 요리에 빠지지 않는 소금,
시편 29:11,
디모데후서 1:7 말씀.
하루에 두 시간씩 꼬박 열흘, 카페에 가 요리를 했다.
갓 나온 따끈따끈한 내 요리를 시식해 줄 네 명의 선생님들도 지난 주 미리 만났다.
고마운 사람들.
나의 책사들.
내일이면 나는 <2025 유예상식 프로젝트>의 다음 장을 열어야 한다.
바로 교실, 교실마다 방문해 선생님들께 설문에 응해달라 부탁드리는 것.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감사히, 때론 기꺼이 해주시겠지.
그런데, 마흔 다섯 가운데 아홉... 그들의 교실에 들어가는 것을 상상해 보니 싫다.
그 아홉 중에 다섯은 올해 유예한 교사들.
어제, 이안 시인의 시집 <시를 위한 패턴 연습>을 읽었다.
읽다가 <가려진 시>를 발견했다.
아들이 앞에 있는데, 부끄럽게 눈물이 핑 돌았다.
난 튀르키에 지진 구호 활동을 하는 이모도 아니다,
하루에도 수백 번 폭탄이 터지는 가자 지구에서 피 흘리는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을 들것에 실어 나르느라 팔다리 뚱뚱 부은 이모도 아니다.
라오스 시골 마을에서 도서관을 짓느라 바쁜 이모도 아니다.
더더욱 메수트 한세르 씨도 아니다.
그냥 편하게
메수트 한세르 씨에게 바치는 기도만 하면 된다.
날마다 일어나
날마다 나만의 식탁을 차리면 된다.
나만의 식탁만
나만의 식탁만
음식은 이미 요리해 놓았다.
가려진 시
이안
민지가 물었어
-너한테 이모가 있었어?
왜 말하지 않았어?
나한테 이모가 있어
튀르키예 지진 현장에서 구호 활동을 하는 이모
하루에도 수백 번 폭탄이 터지는 가자 지구에서
피 흘리는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을 들 것에 실어 나르느라 팔다리가 뚱뚱 부은 이모
내가 상상하는 이모는
오늘도 라오스 시골 마을에서 도서관을 짓느라 바빠
그렇지만 그런 이모는 나한테 없어
민지한테도 그런 이모는 없대
메수트 한세르 씨를 생각해
튀르키에 지진 잔해에 깔려 숨진 열다섯 살
사진 속에서
영원히 딸의 손을 잡고 있는
나한테 이모가 있어
나한테도 없고 민지한테도 없는 이모야
이모, 이모는 나의 메수트 한세르 씨야
산맥을 넘고 사막을 건너
메수트 한세르 씨에게 바치는 기도야
꿈에서도 나는 말해
메수트 한세르 씨,
당신은 죽지 말아요
날마다 일어나
날마다 당신의 식탁을 차리세요
_ <시를 위한 패턴 연습, 2025, 상상출판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