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년 만에 학교로 돌아왔다. 6학년을 맡을 거라 생각했는데, 기대도 안 한 2학년을 맡게 되었다. 꿀 학년이 주어진 대신 3D 업무인 돌봄 업무가 주어졌다. 복직한 지 한 달도 안되어 '성립전예산 편성'이라는 듣보잡 일도 하게 되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줄 알고 군말 않고 했다. (지금이라면 행정실에 항의했겠지. '아무런 참고 자료도 안 주고 이런 걸 해내라고요?) 동학년에서는 학년 교육과정을 맡았다. 10분 간 못한다고 버텼는데, 더 버틸 수가 없어서 그냥 받았다. (지금이라면 더 버티었을 거다.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그리고 말했겠지. "이건 부장님이 하셔야 할 것 같은데...") 게다가 집과 학교와의 출퇴근 시간은 왕복 3시간 40분이 넘었다. 한마디로 잔인했던 한 해였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반 아이들은? 만만치가 않았다. 담임교사인 내 상황이 만만치 않은데, 아이들 상황이 만만하면 이상한 거겠지. 교직 15년 차가 되니 이젠 경험치로 안다. 교사가 평화로워야 아이들도 평화롭다.
옆 반은 참 평화로워 보이는데, 우리 반만 유독 사고가 많았다. 남자아이들끼리 다툼도 많았고, 다치는 일도 잦았다. 뒤로 나가서 서있기, 명심보감 쓰기... 갖가지 벌을 주어도 아이들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다 시엄니 시절 다짐했던 '시 교육'을 생각했다.
'시가 이 아이들을 좀 차분하게 만들지 않을까?'
'시 교육'을 2학년 교육과정에서 어떻게 펼칠지 연구했으면 좋으련만. 그럴 겨를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다. 그러다 생각해낸 게 '남아서 시 외우기'로 벌칙. 지금 생각하면 시 교육이라 말할 자격도 없다. 윤동주 동시, 도종환, 안도현, 함민복 시 등등... 생각나는 시들을 검색해 출력하고 코팅해서 책자를 만들었다. 행이 짧은 시부터 긴 시 순으로 짜임새 있게 배치했다. 잘못된 행동을 하면 두 번까지 참았다가 세 번째에 '남아서 시 외우기' 벌칙을 내주었다.
시엄니 아마(엄마, 아빠의 줄임말로 공동육아 호칭)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니, 반응들이 다양했다. 그렇게라도 공교육 현장에서 시 교육을 애써 실천하고 있다며 엄지 척을 해주는가 하면, 아이들이 오히려 시를 더 멀리할 것 같다며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래도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갖가지 벌을 주어도 별로 달라질 것 없던 아이들이었는데, '남아서 시 외울까?' 얘기는 통했다. 그 얘기는 어린 아이들에게 '경찰 아저씨 와서 잡아간다'로들렸으리라.
선생님, 나 이 시도 다 외웠다요.
남아서 시 책자 7쪽에 나와있는 '거짓부리'를 외워야 했던 승현이가 갑자기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내 책상 앞으로 와 외워댔다. '거짓부리'와 '별 헤는 밤' 사이는 멀다. 시 구절처럼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거짓부리' 시를 외우고 다른 시를 무려 20편 정도 외운 후에 맨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시가 '별 헤는 밤'이다.
'계속 선생님 말 안 듣다가는 이런 어마무시한 시도 외우게 돼.'
하는 아이들 협박용으로 시 책자 맨 마지막에 집어넣은 시, 나도 완전히 외우지 못했고, 반 아이 누구도 외우지 못하리라 생각한 시. 35행으로 이루어진 그 긴 시를 승현이가 하나도 안 틀리고 줄줄줄 외워댄 거다.
승현이는 '남아서 시 외우기 벌칙' 단골손님이다. 깨진 앞니를 환하게 드러내며 잘 웃던 아이. 그 앞니는 국어 시간 연극 공연을 하는 중에 같은 모둠 남자아이와 몸 장난을 하다 창문에 부딪혀 깨졌다. 그 해 나에게 가장 곤혹스러웠던 사건.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2학년이던 승현이가 이 첫 연을 읊어낼 때, 그 모습이 얼마나 멋지게 보였던지.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너 어떻게 외웠어? 이 시?"
깜짝 놀라는 내게
"TV에 많이 나오던데요."
라고 말해주었다.
"TV에? 그래? 승현아, 엄마, 아빠 앞에서도 외웠어? 대게 좋아하시겠다."
수업 시간 내내 무진장 말을 안 들어서 남아 벌을 주고 있었던 아이에게 칭찬 세례를 해주었다. 솟았던 미운 감정은 사라졌다. 그러자 승현이는 배시시 웃으며
"나 이 시도 안다요."
하며 이번에는 윤동주의 또 다른 시, '서시'를 외워댔다.
그 해 TV 무한도전에서 '위대한 유산' 특집을 했다. 가수 개코와 황광희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모티브로 '당신의 밤'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승현이가 그 프로그램을 많이 봤나 보다. 교실에 남아 자주 보던 시 책자 속의 '윤동주' 이름이 TV에 나오니 참 반가웠겠지.
그때 가르쳤던 아이들을 생각하면 승현이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참 말썽을 피워 나를 힘들게 했던 아이가 아니라, '별 헤는 밤' 시를 내게 들려주었던 멋진 아이로 남아있다.
'시 외우기 벌칙'은 그 후 2년은 더 써먹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지 않는다. 득 보다 실이 많았다. 시에게도, 그리고 아이들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