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일 일요일은 현서의 생일이다. 일요일에는 학교에 못 오니까 어제 금요일에 현서 생일 축하 엽서를 썼다. A4 색지를 반으로 자른 엽서용 종이를 내게서 가져가자마자 나빈이가 물었다.
"현서야. 너 뭐 좋아해?"
"초코 케이크에다가 딸기 우유."
"그러면 초코 케이크 그려 주면 돼?"
"응. 그리고 라이언도 그려줘."
현서는 자기 색깔이 뚜렷한 아이다. 얼굴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내 딸이랑 참 닮았다. 역시나 생일 축하 엽서를 쓰는 시간도 달랐다. 자기 생일 축하 엽서를 써주는 아이들 사이사이를 마치 시험 감독하는 사람처럼 돌아다녔다.
"너 그러니까 꼭 사장님 같다."
그런 현서를 보고 누군가 말했다. 누구였을까? 아이들은 본 대로 말한다. 정확하다.
이번에는 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다니고 있는 현서에게 다가가 물었다.
"장수풍뎅이 그려도 돼?"
"안돼. 나 그런 거 싫어해."
풀 죽은 준이는 자리로 돌아갔다. 무얼 그릴까? 궁금해 가서 봤더니 꿋꿋이 장수풍뎅이 종이접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는걸 싫다고 해서 종이접기를 하는걸까?'
아이들 모습을 조용히 관찰하다 몇 마디 꺼냈다. "얘들아. 현서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지만, 현서랑 있었던 특별한 일들을 글로 적어주면 더 좋을 것 같아."
내 말이 끝나자마자 몇몇 아이들이 대답했다.
"그런 거 없는데요!"
"에이... 잘 생각해봐. 내가 생각하는 현서의 모습. 현서랑 말을 나누지 않았어도 내가 생각하는 현서의 특별한 모습을 생각해서 적어주세요."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었을까? 아이들은 열심히 그리고 열심히 글을 썼다. 그러다 민상이가 씩씩하게 물었다.
"양현서, 너 어떤 나라 좋아해?"
"어떤 나라라니? 대한민국이겠지. 그럼 너는 아프리카 좋아하겠냐?"
현서만큼 야무진 서영이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해준다. '친구에게 그렇게 얘기하면 안 돼.' 얘기할까 하다
"어, 아프리카는 나라 이름이 아닌데... 대륙 이름인데."
라고 말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나 미국. 미국 좋아해!"
잠자코 있던 현서가 대답했다.
"알았어. 내가 미국 그려줄게. 선생님, 미국 국기 어떻게 그려요?"
윤성이가 벌써 그렸다고 종이를 내밀었다.
살펴보니, 생일 케이크와 과일들만 그려져 있다. 글을 몇 줄 적으면 좋겠다고 하니, 글 쓸 자리가 없다고 한다.
"여기 케이크 아래, 빈칸 있잖아. 여기에 쓰면 되겠네."
"여기다가요? 어떤 말 써요?"
"어떤 말 쓰고 싶어? 모두가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윤성이만 쓸 수 있는 말이 어떤 게 있을까? 현서랑 했던 얘기 생각해봐. 친하게 지내자 그런 말은 누구나 다 쓸 수 있는 거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한다.
"없. 어. 요."
"없어? 그럼 현서의 장점이나 매력을 한 번 써봐."
"그런 거 몰. 라. 요."
"음... 선생님이 보기에, 현서랑 윤성이는 닮은 점이 있어. 그게 뭐냐면, 친구가 어려워할 때 제일 먼저 뛰어오는 사람. 남자 중에 윤성이가 그렇다면, 여자 중에는 현서가 그래."
윤성이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묻어난다. '선생님이 지금 뭔 소릴 하는 거지?' 하는 표정이다. 1학년인 아이를 붙잡고 내가 너무 했나? 결국 내가 불러주고, 윤성이가 받아 적었다.
민정이도 엽서에 그림과 종이 접기만 있다. 글이 없다. 윤성이에게 했던 것처럼 다시 되짚어 물으니, 민정이는 기억을 더듬어 냈다.
"6월에 길에서 현서를 만났어요. 그게 좋았어요."
"그럼 그 얘길 써줘. 현서가 나중에도 민정이 글을 보고 기억할 수 있게."
마칠 때쯤 정민이가 생일 엽서를 들고 나왔다. 역시나 이번에도 어몽어스 그림이다. 3월 생일 축하 엽서부터 지금까지 쭉. 그런데 뒷 장을 보고 웃음이 터졌다.
현서야. 생일을 축하해. 잘 살아야 되.
"그런데, 정민아. 어떻게 하는 게 잘 사는 거야?"
"음... 건강하고... 행복하고... 음... 부자 되고..."
"그러면 그 얘기를 다 써줄래?"
자리에 간 정민이가 얼마 후 다시 들고 나왔다. 보고 또 웃었다.
"정민아. 아까 건강하고, 행복하고, 부자 되는 거 쓴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부자 되는 거 하나만 썼어?"
"그냥..."
멋쩍어했다.
우리 반 아이들과 매월 말 생일잔치를 한다. 생일잔치 때 반 친구들이 쓴 생일 축하 엽서 책을 건네준다. 처음부터 했던 것은 아니다. 예전에 옆 반에서 생일잔치하는 것을 슬쩍 볼 때마다, '학교에서 생일까지 챙겨줘야 하는 걸까?' 했는데, 내 자녀들 어린이집 생일잔치 경험 후 생각이 바뀌었다.
파란하늘 공동육아 어린이집 생일잔치는 조금 특별했다. 생일 주인공이 친구들이 해준 팔 가마를 타고 떡케이크, 제철 과일 등으로 차려진 생일상 앞에 앉으면, 아마(엄마, 아빠)가 쓴 생일 축하 편지를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전체 아이들에게 읽어준다. 그리고 선물 증정을 한다. 선물은 어린이집 모든 아이들이 직접 쓴 엽서 꾸러미를 엮은 책. 4~6살 어린이들의 엽서는 대부분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외계인이 그렸을 법한 단순한 선 몇 개로 이루어진 그림. 7살 형님들이 쓴 엽서에는 제법 한글이 쓰여 있기도 하다. '우리 집에 놀려 와.' '내가 아끼는 장난감 줄게.'는 단골 멘트. 지금 5학년인 규진이와 서진이는 그 생일 엽서를 아직도 꺼내 읽는다. 그것을 보고 '생일잔치가 하나의 교육이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현서 생일 축하 엽서 쓰기를 하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눈에는 이 시간이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라도,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걸.
텅 빈 종이를 보며 '어떻게 채울까?' 고민하고 결정하는 자치의 시간. 네가 좋아하는 것을 물으며 너를 알아가는 적응의 시간. '쓸까?' '그릴까?' '종이접기 할까?' 내가 잘하는 것으로 내 마음을 표현하는 진로의 시간. 내 엽서를 읽고 네가 기뻐할 모습을 생각하며 열심히 종이를 채워가는 봉사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