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로 돌아가게 만들어주는 달리기에 대하여
저 멀리, 내 시선의 끝 자락에 있던 나무가, 내 옆을 지나친다. 곧이어 그 나무보다 더 앞서 걸아가던 사람들의 말소리가, 크게 들리다 이내 작아진다. 주위 배경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나무를 앞지르고 사람들을 제치며, 숨, 가쁘게, 달려,간,다. 숨,을, 참기도, 때론, 거,칠게, 내쉬기도, 하면서, 앞,으로 달려,간,다.
“5킬로미터를, 완료, 하였습니다. 시간, 삼십,칠,분, 사십,구, 초, 거리, 오, 킬로미터, 평균, 속력입니다 …”
숨 가쁘게 달린 탓에 거칠어진 나와는 달리, 차분한 안내 음성을 듣고 나서야 두 다리를 멈출 수 있었다. 그 안내 음성이 너무도 차분한 탓에, 나처럼 숨을 헐떡거리며 박진감 넘치게 말해준다면, 괜스레 동기부여가 되어 조금 더 열심히 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양 무릎 안쪽이 저릿하고, 심장은 금세라도 터질 것 같다. 내 산소탱크의 산소가 바닥나고, 뇌에는 피가 멈추어져 있는 듯한 기분이 이어진다. 천천히 발을 구르며, 양 손을 크게 올렸다 내리며 숨을 고른다. 최대한 깊게 숨을 들이마시어 보고 입으로 힘차게 뱉기를 반복한다. 내 머릿속에는, 오늘이 유난히 힘들었다, 평소보다 페이스가 느리다, 그리고 집에 가서 얼음을 띄운 시원한 냉수 한 잔 벌컥 마시고 싶다는 생각만이 남아있다. 나를 그토록 괴롭히는 생각들은, 단 삼십칠 분 만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린다.
나는 단단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성인이 된 이후에 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나 관계를 형성했고, 여러 조직에 속하여 나의 책임을 다하였다. 조직생활이든, 한 그룹의 리더든, 다양하고 또 깊은 경험들을 하며 성격의 변화를 겪기도, 깨지기도 다시 붙이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는 단단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또 최근엔 혼자서 남미 배낭여행을 두 달여간 다녀왔고, 나의 이야기를 들은 주위 사람들은 ‘혼자? 안 위험했어? 대단하다’라는 반응이었으므로, 단단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에 대해 설명력도 갖추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의 껍질과는 반대로, 너무도 말랑한 사람이었다. 다름 사람이 쿡 찌르면 피가 나고, 금세 눈물이 고이는 그런 무른 복숭아 같은 사람인 걸 이제야 알았다.
남미를 다녀온 후에 취업을 준비하기도, 개인적인 일들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려 나를 소모하기도, 또 누군가를 좋아하기 위해 앓기도 하였다. 취업 시장의 어려움과 지난 인연에 대한 아쉬움, 일상을 파괴하는 코로나까지 어느 것 하나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없었다. 내가 남미를 여행하며 그렸던 나의 2020년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나의, 나다운 계획들이 하나 둘 무너졌다. 다른 사람들이 남긴 성공의 결과를 보며, 왜 나는 그렇지 못할까, 왜 나는 나 밖에 되지 못할까 하는 물음을 던진다. 자조 섞인 물은 나를 파고들어 속을 무르게 만든다. 내 자신에게 실망하고, 감정에 치이고, 내가 감정을 쏟은 사람들의 말에 뒤흔들리는 나를 보며, 나는 나를 잃어버린다. 단단한 생각을 품더라도 금세 남에게 맞추려 하거나, 내가 세운 기준에 갇혀 스스로를 옭아맨다. 나는 단단하지 못한 무른 사람이었다. 무른 복숭아의 속살이 흘러내리기 시작하면,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울한 음악을 듣거나 우울한 영화를 보며 하루 종일 무기력을 연습한다.
그런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달리기이다. 지푸라기를 잡으려 조차 하지 않은 와중에도, 무정하게 어둔 방을 비집고 들이치는 햇살을 보거나, 그 햇살에 이끌려 문을 열었을 때의 쨍한 공기, 때론 너무도 꿉꿉한 습도마저도 나에게는 달리라는 방아쇠가 된다. 심지어 무심코 보게 된 오늘 미세먼지의 수치를 나타내는 표정마저도 그렇다. 이런 방아쇠가 좋은 것은, 내 통제 밖이라는 것이다. 한번 우울에 빠진 나는, 쉽사리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빠져나오더라도 많은 소모를 겪은 이후이고, 이것은 사실 더 소모할 게 없어 나왔다는 게 더욱 적절한 이유이다. 그렇기에 내 남은 것들이 모두 소모되기 전에, 나를 빠져나오게 도와주는 외도치 않은 방아쇠가 좋다. 이 사실을 알기에, 피부에 달라붙는 기분 나쁜 습도조차, 기분 좋은 방아쇠로 생각한다.
방아쇠를 당겨 뛰기 시작하면 나의 무른 살들은 다시 익어가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정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였고, 내가 나 밖에 되지 못하는 그 무수한 상황 속에도, 달리기 만큼은
‘내가 저기까지 도달했다’
‘내가 이 시간 동안 뛰었다’
‘내가 저 사람을 제쳤다’
와 같은 의미를 만들어낸다. 자기 무력감이 정점을 찍은 피폐한 상황 속에서. 작지만 뜻깊은 성과들은 비로소 나를 나답게 만들어 준다.
스스로 엄격한 사람, 그러니까 본인이 스스로 정한 기준으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사람. 그리고 그 잣대로 채찍질하는 사람들은, 대게 스스로 하는 칭찬에 인색하다. 아무리 작은 목표를 세워 그것을 이루더라도, 스스로 깎아내린다.
‘아니, 아침 8시에 일어나는 게 뭐 그리 잘한 일이야. 내가 정한 [일주일에 책 한 권 읽기]도 못하는데’
이들은, 아니 나는, 이런 모습에 스스로가 물러진다. 그래서 더욱 우울을 쉽게 나오지도, 나올 수 있을 만한 강한 끌어당김도 없다. 그렇기에 더욱 달리기가 나에겐 중요하다. 달리기는 육체를 통해 움직인 만큼 본인의 한계가 명확하다. [일주일에 책 한 권 읽기]처럼 마음먹으면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한다. 아무리 숨이 터지게 뛰어도, 오늘 당장 5분 페이스로 진입할 수 없다는 그 한계. 그 한계가 있기에 스스로 성장했다는, 발전의 근거가 명확해진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통해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어제와는 다른 나를 보며 내가 뿌듯해지고 내가 좋아지게 된다. 페이스를 줄이지 못하더라도, 어제 달렸던 코스보다 한 블록을 더 달리거나, 나보다 앞서 러닝 하는 사람들을 두 명이나 앞질렀다는 성과들은 충분히 나를 무력감에서 끌어당겨줄 수 있다.
정해진 키로를 다 뛰었거나, 혹은 2킬로나 넘겨 뛰었거나. 페이스를 줄이거나, 혹은 줄이지 못했더라도 땀을 많이 흘렸거나. 사람들을 제치거나, 혹은 내가 정한 포인트까지 쉬지 않고 전력질주를 했다거나 하는 성취들은, 나를 황홀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나는 조금이라도 내가 나답지 못하거나, 나를 비난할 때가 되면, 그냥 뛰러 나간다. 만약 약간의 생각으로 버벅거려도 걱정은 하지 않는다. 어김없이 내 통제 밖의 방아쇠가 발사되어, 나는 결국 뛰고 있을 테니 말이다.
뛰는 것은 좋은 행위이다. 비록 무릎에 내 체중의 3배에 달하는 부담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꾸준히 달리는 것은 그만큼의 이점이 있어서이다. 나는 그래서 공원에서 신나게 내달리는 사람들이나, 한강에서 꾸준히 앞을 헤쳐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도 그들다워지고 싶어서 달린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의 뒷모습에서, 머리털을 지나 목을 타고 내려가는 땀방울에서, 동질감과 강한 동기를 부여받는다.
달리자.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달리기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