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산티아고 음식&맛집 랭킹 Top8 - 3위 치피로네스
<80일간의 신혼여행> 39번째 글.
'스페인 산티아고 음식&맛집 랭킹 Top8'의 다섯 번째 글이자, 3위 깔라마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묵은 마을, O Pedrouzo(오 뻬드로우조). 바로 이 이곳에서 베드버그에 물렸다. 산티아고 길을 겨우 19km 남겨두고 베드버그에 물리다니, 억울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마을에 큰 억하심정은 없다. 오히려 좋은 기억이 있는데, 바로 이 음식 덕분이다.
https://maps.app.goo.gl/yetjbQjv75hX2q4x7
식당의 이름은 ‘O km19’. ‘km19’에서 알 수 있듯, 산티아고 길의 도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19Km 남은 지점에 있는 마을이자 식당이다. (여기서 ‘O’는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에서 ‘the’나 ‘of’를 뜻하는 관사이다.) 그러니 이 식당에서 먹는 음식이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먹는 사실상 마지막 저녁이라는 말이다. 과연 산티아고 맛집 순례단의 마지막은 어떻게 끝날까, 기대와 걱정을 안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길가에서 좁은 샛길을 따라 안쪽으로 쭉 들어가야 모습을 보였다. 식당 입구에 들어서자 전반적으로 한적한 마을의 분위기와 정반대로 시끌벅적한 대화 소리와 음악이 들렸다. 넓은 야외 식사 장소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는데, 큰 천막의 안과 밖에 야외 테라스를 설치하여 파티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스페인 치곤)식사를 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벌써부터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있었다.
대부분 산티아고 길을 걷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 사람들의 표정과 말투에는 약간의 흥분감과 안도감, 혹은 (아마도 얼마 남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나 있었고, 행색은 초라했기 때문이다. 신남과 아쉬움이 섞인 묘한 분위기 속에 우리도 덩달아 시원섭섭한 감정에 물들었다.
얼마 후 테이블 담당 웨이터가 와 테이블 세팅지를 놓고 갔다. 거기엔 메뉴와 함께 산티아고 길의 다양한 루트가 지도에 표시되어 있었다. 그 모든 길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은 뒤로 하고, 메뉴를 살펴봤다. 제일 위에 ‘Plato del Día’(쁠라또 델 디아)가 보였다. ‘오늘의 메뉴’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데, 식당에 따라 ‘Menu del Día’(메누 델 디아)로 적혀있는 경우도 있다.
오늘의 메뉴를 보면 크게 세 파트로 나뉘어 있다. 식전, 메인, 후식. 오늘의 메뉴를 시킨다면 각 파트별로 음식을 하나씩 고르면 된다. 13유로로, 약 1만 6천 원 정도에 나름 코스요리를 먹을 수 있으니 순례자들에게는 좋은 선택지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의 메뉴를 선택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음식의 종류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샐러드, 파스타, 치킨 혹은 돼지고기구이.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갈리시아 지방에 들어선 이후 본격적인 맛집 순례단으로 변모한 우리는 최대한 다양한 음식을 즐기기 위해 개별 메뉴를 시켰다. 오늘의 메뉴 밑에 있는 음식들이다.
메뉴를 보면 크게 Bocadillo(보카디요), Raciones(라시오네스), Hamburguesa(암부르게사) 등이 있는데, 각각 스페인식 샌드위치(차이는 빵에 바게트를 쓴다는 것), 나눠서 먹을 수 있는 개별 요리, 햄버거이다.
이 중에서도 주목해야 할 것은 라시오네스이다. 이름부터 생소한데, 정확히 따지자면 음식의 종류라고 볼 수는 없다. 포션(portion), 즉 음식의 양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요리를 먹으려면 이 라시오네스에 속한 메뉴를 시켜야 한다. 더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 있고, 서로 나눠먹을 수 있게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Chipirones a la Plancha(치피로네스 알 라 플란차)와 Ensaladilla Rusa(엔살리디야 루사)를 주문했다. 엔살라디야 루사는 러시안 샐러드라는 뜻인데, 왜 굳이 스페인에서 러시안 샐러드를 팔까(다른 식당에서도 자주 보이는 메뉴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1860년대에 모스크바의 요리사에 의해서 개발된 이래 스페인을 비롯한 남미 국가에 퍼졌다고 한다. 감자, 계란, 참치, 올리브, 마요네즈 등을 섞은 샐러드인데, 아마도 스페인 사람들의 입맛에 맞았던 게 아닐까?
아무쪼록 스페인에서 샐러드는 꼭 시켜야 하는 음식이기에 기본으로 주문을 했고(어딜가든 맛있다.), 오늘의 메인은 치피로네스다. 치피론(Chipiron)은 일반 오징어 대비 1/10 크기 정도의 작은 오징어를 이야기하는데, 갈리시아 지방에서 많이 잡힌다고 한다. 일반 오징어는 스페인어로 Calamari(깔라마리)라고 한다. 이 치피론은 요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겠지만, 오늘 주문한 음식은 a la plancha(알 라 플란차), 즉 철판에 구운 오징어 요리이다.
스페인의 음식을 먹으며 느낀 것은 대부분 음식들의 조리법이 간단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음식과 달리 양념도 거의 없다. 올리브유, 소금, 레몬즙 정도가 곁들여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간장, 된장, 고추장을 필두로 각종 가루와 기름, 조미료로 풍부한 맛을 내는 한국의 가정식과 달리, 스페인의 일반적인 음식들은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고 있는 듯했다.
오늘 시킨 치피로네스 역시 마찬가지. 치피론이라는 작은 오징어를 올리브 오일과 함께 구워내고 그 위에 파슬리와 소금을 뿌려 낸, 어찌 보면 소박한 음식이다.
통째로 구워진 작은 오징어는 올리브 오일을 한껏 머금어 촉촉하고 향긋했다. 그 위에 듬뿍 뿌려진 파슬리는 그 풍미를 더했다. 산티아고 길 식당 특유의 (정말 일관되게 볼품없는) 접시에 놓인 이 작은 오징어 철판구이는 언제나 그렇듯 예상 밖의 맛을 냈다.
듬뿍 쌓인 치피로네스를 걷어내니 밑에 큼지막한 삶은 감자가 드러났다. 그릇 바닥에 모여있는 짭짤하고 향긋한 올리브오일을 가득 머금고 있는 감자였다. 포슬포슬한 감자를 포크로 대충 잘라내어 한 입 넣으니, 감자의 고소한 맛이 그대로 느껴진다.
싱싱한 치피론과 스페인 감자의 맛을 살리는 데 집중한, 간단하다면 간단한 요리이지만 다양하고 풍부한 향과 맛이 뒤섞여 먹는 재미를 더했다. 특히 밑에 고여있는 올리브 오일은 소위 ‘엑기스’라 할 수 있었다. 치피론으로, 감자로 한 방울도 남김 없이 싹싹 긁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우리의 주류 선택이었다. 이전 마을에서 샀던 치즈가 남아 포장을 해왔었는데, 이 치즈랑 같이 먹기 위해 레드와인을 이미 시킨 뒤였기 때문이다. 물론 와인도 좋았지만, 역시 오징어에는 맥주인데 생각이 짧았다. 혹시 스페인에서 치피로네스를 시킨다면 맥주와 드셔보시길…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 철판에 구운 오징어를 먹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오징어 하면 영화관이나 편의점에서 먹었던 허니버터 오징어구이 혹은 마른 오징어구이 정도 아닐까. 철판에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굽는 간단한 요리이지만, 한국에서는 쉽게 만나기 힘든 음식 치피로네스 알 라 플란차.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면 꼭 한 번 먹어봐야 할 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