츄라스꼬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O’Tipico(오 띠삐꼬)라는 식당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곳은 우리가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루 동안 두 번이나 식사를 한 곳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식당 때문이 이 마을에 하루 더 있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까지 했다.
이 가게의 이름은 ‘전형적인’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전통 스페인 식당’ 정도의 뜻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러니 이곳은 한식집에서 가장 일반적인 한국의 맛을 볼 수 있는 것처럼, 퓨전이나 재해석 없는 가장 평범한 스페인 음식을 만날 수 있는 곳일 것이다. 실제로 메뉴를 보면 레스토랑에서 볼 수 있는 근사한 요리는 없고, 비교적 간단한 음식들이 대부분이다.
가게의 간판을 보면 ‘Hanburgueceria’(암부르게세리아), ‘Pulperia’(뿔뻬리아)라는 글자를 볼 수 있는데,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햄버거(샌드위치) 전문점, 뿔뽀(문어) 전문점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스페인에는 단어 뒤에 ‘ria’를 붙여서 가게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Cafeteria’(카페테리아)도 같은 방식이다. 롯데리아도..
우리가 이 식당을 알게 된 것은 알베르게(스페인 산티아고의 순례자를 위한 숙소) 주인의 추천 덕분이었다. 뿔뽀 요리를 잘하는 식당을 알려줄 수 있냐고 물었는데, 별 고민도 없이 이곳을 추천해 줬다. 이미 20km를 걸도 도착한 마을이었고, 숙소에서 꽤 먼 거리였지만 이미 갈리시아 지방의 음식을 맛보고 흠뻑 빠진 뒤라 지체하지 않고 식당으로 향했다. 그렇다. 순례자 흉내라도 내보려 했던 우리는, 갈리시아 지역으로 넘어오면서 맛집 순례단으로 변절해 있었다.
식당 간판에 적혀 있는 Pulperia라는 글자를 보며 믿음이 생겼다. 뿐만 아니라 식당 내부의 모습에서도 맛집의 분위기가 풍겼다. 전혀 세련되지 않은 디자인, 낡은 나무 기둥, 바 너머로 보이는 오래된 조리도구, 그럼에도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는 주방. 거기에 현지인 손님들도 북적이고 있었다. 여기는 맛집일 수밖에 없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눈길을 끈 것이 또 한 가지 있었는데, 고기를 굽는 그릴이었다. 그 그릴 위에서 큼지막한 고기가 구워지고 있었는데, 후드로 연기가 빨려 들어가고 있음에도 그 풍성한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저거 진짜 맛있겠다…’ 속으로 생각하며 안내받은 자리에 앉았다.
그릴에서 구워지고 있는 등갈비
메뉴판 맨 위에 뿔뽀가 있었다. 하지만 이 곳의 최고 메뉴는...
메뉴판을 보는 데 뿔뽀 사진이 가장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 여기선 뿔뽀를 시켜야지… 하지만 저기 주방에서 구워지고 있는 등갈비가 계속 눈에 걸렸다. 메뉴판을 보니 Churrasco라는 음식이 보였다.
Churrasco(츄라스꼬)는 남미, 스페인에서 자주 먹는 고기 구이 요리이다. 그릴에 다양한 고기를 꼬챙이로 꿰어 굽거나 통째로 굽는다. 남미에서는 슈하스쿠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특히 브라질의 국민음식으로 불리는 듯하다. 한국에도 ‘텍사스 데 브라질’이라는 그릴 바베큐 식당 체인이 있을 정도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갈리시아 지방에서 자주 먹는 음식이라고 한다.
이번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츄라스꼬를 한 두 번 먹어본 적이 있다. 갈리시아 지방에 들어오기 전이었는데, 맛있긴 했지만 고기 냄새가 약간 나기도 했고, 조금 질겼던 터라 아주 맛있는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차라리 한국에서 등갈비찜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하지만 여기는 맛에 진심인 갈리시아 아닌가. 여기서도 츄라스꼬를 한 번 먹어보고 싶었다. 특히 이 식당에서 나는 고기 굽는 냄새는 환상적이었다.
아내도 고기 냄새를 맡으며 고민을 하는 모양새였다. “우리 뿔뽀 말고 저거 먹을까?” 넌지시 제안을 건넸다. 아내도 고민을 했지만, 뿔뽀 맛집으로 추천을 받고 왔으니 뿔뽀를 먹는 게 어떠냐는 답이 돌아왔다. 맞는 말이다.
“그럼… 혹시 두 개 다 시키는 건 어떨까?!”
호기롭게 물었지만 총무 역할을 맡고 있는 아내는 단호하게 “정신차려!” 라는 말로 일갈했다. 사실 길을 걸으면서 입이 터져 먹는 데 돈을 많이 쓰긴 했다. 그래, 뿔뽀를 먹자.
우리는 15유로짜리 뿔뽀와 4유로짜리 샐러드 하나를 시켰다.
저녁에 이 식당을 다시 오자고 마음먹은 것은 4유로짜리 샐러드 때문이었다.
상추, 양파, 토마토에 올리브유와 식초, 소금을 뿌린 게 다인 볼품없어 보이는 그 샐러드를 먹고는 약간 과장해 충격에 빠졌다.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
한국에서 맛집을 알아보는 방법 중에 하나로 그 집의 김치 맛을 보는 방법이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샐러드를 먹으면서 이 집, 맛집이다 하는 확신이 들었다. 분명 생 야채인데 잘 익은 김치를 먹는 것 같은 상큼함이 있었다. 올리브유와 식초에 절여진 잘 익은 샐러드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두고두고 생각나는 최고의 샐러드.
샐러드를 먹으면서 아내가 봉인해제 되었다. “저녁에 츄라스꼬 먹으러 또 올까?”
그릴을 향한 내 눈빛에 든 안쓰러운 마음과 동시에 샐러드 맛에 감탄한 아내가 먼저 제안을 했다. 나는 당연히 오케이.
그리고 나온 뿔뽀 역시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 쫀득한 식감의 문어요리, 그 밑에 고여 있는 진한 올리브오일, 마음껏 맛을 즐기며 점식 식사를 마쳤다.
뿔뽀도 맛있었다.
숙소에서 샤워를 하고, 짐 정리를 하고, 낮잠을 자고 난 시간은 저녁 6시.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산티아고 길에서 저녁 6시에 장사를 하는 식당은 네 잎 클로버 만큼이나 찾기 힘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식당을 찾아갔지만 역시나 문이 닫혀 있었다. 길을 지나가는 주민을 붙잡고 이 식당이 언제 문을 여는지 물어봤다. 어떤 사람은 7시 반, 어떤 사람은 8시를 말했다. 어쨌든 한두 시간은 때워야 한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마트에 들렀다. 내일 먹을 간식을 사고, 과일 가격을 살펴봤다. 한국보다 훠얼씬 싸다. 이 점은 참 부럽다. 그러나 냉장고의 한기 때문에 추워서 길거리로 나왔다. 할 일 없이 벤치에 앉아있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피해 근처의 서점에 들어갔다. 주인과 손님이 대화를 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정말 말을 빠르게 한다. 손님은 인사를 하고 나가다가 갑자기 뒤들 돌아 말을 이어 나간다. 그렇게 10분 이상 수다를 떨었다. 우리는 혹시 영어 책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으나 어차피 사지 않을 것 같아서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그분들의 대화에 끼어들 자신이 없기도 했다.
다행히 7시 반이 되니 비가 그쳤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설레는 마음으로 식당을 향했다. 과연 열었을까?
역시, 스페인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식당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다만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는데, 그 너머로 직원들이 장사 준비를 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구태여 그 창문 너머로 질문을 했다. “여기 문 언제 여나요?” 다행히 8시에 연다고 했다.
남은 시간이 애매해 식당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러다 창문 너머의 직원이 우리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해 보니 민망해졌다. 우리를 배곯아 있는 불쌍한 순례자로 생각할까? 걸신들린 여행자? 식당에서 좀 떨어진 곳에 가 있기로 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식당 문을 저녁 8시에 여는 것은 참 적응하기 힘들다. 스페인 문화를 알아보니 스페인에서는 점심을 잘 챙겨 먹고, 4~5시쯤 간식을 먹고, 저녁은 간단하게 먹는 게 일반적이라고 한다. 때문에 저녁 식사 시간이 늦어진다고 하는데, 어쨌든 매일같이 일찍 잠들고 일찍 일어나야 하는 순례자에겐 여간 서글픈 일이 아니다. 항상 배고프다..!
바 손님을 제외하곤 우리가 저녁타임 첫 손님이었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8시 땡 치자마자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가 첫 손님이었다. 자리를 안내 받자 마자 일말의 지체도 없이 주문을 했다. 츄라스꼬 하나, 샐러드 하나, 맥주 한 잔, 콜라 한 잔.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실제로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이 마을 사람을 보였다. 그릴에서는 우리가 먹을 고기가 구워지고 있었다. 향긋했다.
샐러드가 먼저 나왔다. 고기랑 함께 먹고 싶었는데 참을 수 없었다. 다시 먹어도 맛있는 김치를 연상하게 하는 맛이었다. 절반은 남겨두자. 고기랑 같이 먹어야 하니깐.
곧 츄라스꼬가 나왔다.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등갈비가 두 덩이. 감자튀김. 그리고 추가 주문한 구운 초리소가 담겨 나왔다. 초리소는 스페인식 소시지인데, 보통 생으로 많이 먹는다. 그런데 여기선 츄라스꼬와 함께 그릴에 구워져 나왔다.
절대 잊지 못할 츄라스꼬와 구운 초리소
먼저 등갈비를 각자 한 덩어리씩 앞접시에 옮겨 담았다. 나이프로 한 조각을 잘라내어 포크로 집었다. 이걸 나이프로 썰어야 하나? 아니, 그래도 등갈비는 손으로 먹어야지. 손으로 뼈를 잡고 고기를 뜯었다. 부드러웠다. 질긴 느낌이 전혀 없이 씹는 족족 고기가 해체되었다. 차라리 햄에 가까운 부드러움이었다. 거기에 입안 가득 고기를 씹으니 깊은 불향이 느껴졌다. 바로 저기, 내 눈에 보이는 그릴에서 바로 구워진 이 고기에 불향이 없는 게 이상할 것이다.
첫 입을 먹자 식당 직원이 소스를 들고왔다. 요술램프처럼 생긴 소스 통이었는데, 아마 일반적인 고기구이를 먹는다면 그 소스를 반겼을 것이다. 하지만 좀처럼 소스에 관심이 가지 않았다. 따로 양념을 안 찍어먹어도 될 만큼 고기에 간이 완벽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스도 뿌려봤지만 크게 다른 맛은 나지 않았다. 역시 소스는 한국의 자극적인 맛이 최고야.
그렇게 몇 조각을 먹었다. 마를 법도 한데 고기의 촉촉함이 계속 이어졌다. 중간중간 시원한 맥주 한 모금까지, 몸이 사르르 녹았다.
그새 샐러드는 동이 났다. 한 그릇을 더 시켰다.. 오늘만 세 그릇 째 먹는 샐러드. 그만큼 맛있다.
접시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초리소를 잘랐다. 육즙이 나온다. 과연 구운 초리소는 어떤 맛일까.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나는 살면서 먹었던 모든 소시지들에게 미안해졌다. 미안하지만 이 초리소가 내 인생에 가장 맛있는 소시지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소시지는 알까, 여기 이 초리소가 이렇게 맛있다는 것을. 짭짤한데 담백하다. 기름기는 거의 없는데 촉촉하다. 육즙이 아직 살아있어 씹을 때마다 향긋하고 고소한 맛이 흘러나온다. 우리의 유일한 실수는 이 초리소를 한 개만 시킨 것이다.
이 곳에서 먹은 구운 초리조는 살면서 먹은 최고의 소시지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 날 먹은 츄라스꼬와 초리소, 그리고 샐러드는 충격적으로 맛있었다. 그리고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갈리시아라는 지방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여기 맛잘알 맞네. 한국만큼 음식에 진심이다. 그 진심이 느껴졌다.
맛은 물론 직원까지 친절한 그 식당을 나오면서 정말 진지하게 하루 더 묵으면서 다른 음식도 먹어볼지 고민했다. 그러진 못했지만, 다시 산티아고 북쪽길을 걷는다면, 여기는 꼭, 무조건 다시 가야 할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