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일간의 신혼여행> 산티아고 순례길 완결 2편
우리는 산티아고에서 총 3일을 머무르기로 했다. 약 40일간의 순례자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남은 40일의 여행 전 여행자로 거듭나는 시간을 가지기로 한 것이다.
그 일환으로 산티아고에 도착한 첫날 침낭과 옷 몇 벌을 버렸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날 아침 벌레 물린 자국이 있어 걱정이 되었다. 약국에서 베드버그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남은 옷과 배낭은 통째로 뜨거운 물에 빨았다.) 옷을 버리는 것은 새 옷을 사기 위한 좋은 핑곗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산티아고에서의 둘째 날은 맛있는 음식과 쇼핑을 위해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게 전부였다. 우리는 산티아고에 있는 마사지 샵에서 피로를 풀고, 자라 매장을 돌아다니며 옷을 사고, 산티아고 길에선 볼 수 없었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50유로짜리 밥을 먹었다.
어제 못 받은 산티아고 길 증명서도 받았다. (새로 알게 된 사실. 우리는 프랑스길을 걷다가 중간에 북쪽길로 옮겨 걸었는데, 이 경우엔 북쪽길 거리만 인정이 된다. 고로 444km에 대한 인증서만 받았다.) 날이 개어서 다시 산티아고 대성당에 들르기도 했다. 놀라운 점은 성당 근처로 가자 다시 비가 왔다는 것이다! (다음에 또 걸으라는 뜻인가 보다.)
아무튼 이때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저녁을 먹기 전 쇼핑을 할 때 일어났다.
내일 포르투갈로 떠날 채비를 하기 위해 간식과 아침 식사거리를 사러 대형 마트에 들렀는데, 하루 종일 돈을 쓰고 돌아다닌 여운 때문이었는지 나의 물욕이 최고조를 달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눈과 발로 마트를 헤집고 다녔다.
여러 음식들을 탐냈는데, 마지막까지 고민이 되었던 것은 네 병에 2유로가 채 안 되는 초코 우유과 내가 직접 짜 담을 수 있는 1.7유로짜리 오렌지 주스였다. 식사 때 마실 것은 이미 카트에 담은 상태. 순수하게 간식거리로 사는 것인데, 마실 게 너무 많아지다 보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나는 치열한 고민 끝에 초코우유를 선택했다. 그리곤 계산대를 향해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 순간 나의 잘못은 두 가지였다.
첫 째는 이미 하루 종일 도시를 돌아다녀 피곤해진, 더욱이 저녁시간이 가까워져 배가 고픈 아내를 데리고 마트를 활보한 것이다. 입에 뭐라도 넣어주고 쇼핑을 하거나, 쇼핑 시간을 줄이고 빨리 저녁을 먹으러 갔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아내도 이때까지는 큰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다.
두 번째 행동이 화를 일으켰다. 계산대로 향하는 그 순간 내가 이성을 잃고 오렌지 주스 착즙기로 달려간 것이다. 순간 상큼한 오렌지 주스가 너무 먹고 싶었다. 생 오렌지를 내가 직접 짜서 먹을 수 있다니! 오렌지 주스의 유혹을 결국 이기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카트에 이미 담긴 초콜릿 우유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멀리서 카트를 끌고 다가오는 아내에게 나는 말했다.
“초콜릿 우유도, 오렌지 주스도 다 먹고싶어!”
낮은 목소리로 약간의 언쟁이 오갔다. 아내의 주장은 ‘마실 걸 너무 많이 사는 것 아니냐, 과소비다.’ 였고, 나의 주장은 ‘돈도 얼마 안 하는데 이 정도는 마실 수 있지 않냐’는 것이었다.
절박한 나의 주장에 결국 카트 속 음료들을 모두 유지한 채 결재까지 마쳤다. 마트를 나가자마자 오렌지 주스를 들이켰다. 시원하고 상큼했다. 아내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전혀.
“크으, 자기도 한 모금 할래?”
라고 애써 분위기를 바꾸려고 했지만 아내의 표정에서는 불편한 심기가 느껴졌다.
이런, 마침 저녁으로 먹으려던 케밥집 문도 닫혀있었다. 배고픈 시간이 길어지면 문제가 커지는데…. 아니나 다를까 30분 정도를 더 기다리며 마트에서 했던 각자의 주장을 다시 반복했다.
나는 이 정도도 못 마시나 하는 억울함이 있었고, 아내는 예산이 정해져 있는데, 과욕을 부리는 나에 대한 답답함이 있었다.
우리 부부의 난상토론은 케밥을 주문하고 나서야 비로소 해소되기 시작했다. 우선 아내는 마트 영수증을 하나씩 뜯어보더니 나의 과욕에 대한 애잔함을 느꼈다. 내가 이성의 끈을 놓고 구매한 많은 과일들, 과자들, 음료들은 0.5유로, 1.2유로, 2유로 등등으로 합쳐도 10유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마트에 담긴 음식들을 보면서 굳이 안 사도 될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잔잔한 욕심들이 많다는 것은 나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는 바이다. 특히 다이소 같은 곳을 가면 더 심해진다. 아직 이 버릇을 고치지 못했구나, 나 스스로도 생각했다.
케밥이 나올 때 즈음 우리는 극적으로 화해했다. 케밥집 사장님 입장에서는 썩 당황스런 모습이었겠지.
아이러니한 것은, 이 날을 기점으로 한동안 다툼이 잦아졌다는 것이다. 힘든 산티아고 길을 걷는 동안에도 다툼이 별로 없었는데, 왜 길을 다 걷고 난 지금 다툼이 시작됐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마도 공통의 목적이 사라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산티아고 길에선 몸은 힘들었지만 다음 마을로 간다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간다는 목적의식이 있었다. 하지만 길을 다 걷고 나니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대략적인 여행 계획만 있었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어영부영 시간이 지나가는 게 당혹스러웠다. 아마도 그런 방황 속에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졌던 것은 아닌지….
우리의 다툼은 포르투와 리스본, 마드리드를 넘어 발렌시아에 폭발한 후 잦아들었다. 그 과정과 해결에 다다른 이야기는 2부에서 하기로 하고,
어쨌든 산티아고에서의 둘째 날은 작은 다툼이 있었지만 악수를 하고 숙소로 돌아와 태블릿으로 무한도전을 틀어놓고 함께 케밥을 먹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