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5일의 기록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밤은 22시 취침, 8시 기상이다.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밤은 22시 취침, 7시 기상이다. 인간은 하루에 9시간, 10시간 자도록 설계된 생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항상 중간에 깨고 만다. 새벽에 깨서 다시 잠을 자자면 신경쓰이는 요소가 생각보다 많다. 옆에서 동기(덩치가 커서 산이 걸어다니는 것 같은 녀석이다)가 코고는 소리가 까먹고 시동을 켜놓은 오토바이처럼 신경을 긁기도 한다. 난방이 들어오는 바닥의 온도도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갑거나 해서 일정 범위 밖으로 벗어나면 옷을 벗을까 말까 고민하며 뒤척이게 된다. 화장실이라도 한 번 갔다오는 때에는 잠이 절반 정도는 어디론가 달아나고 만다. 그렇게 고통받는 오밤중의 시간은 샌드위치를 만들 때 식빵 가장자리가 버려지듯 왠지 인생에서 사라지는 시간인 것만 같아서 요즘은 주말에는 아예 늦게 자려고 한다. 다행히 연등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24시까지는 밝은 공간에서 컴퓨터로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할 수 있다. 어제는 일본어 단어를 좀 외우다가 이내 하기 싫어져서 책장에 꽂혀있는 수많은 책들 중 끌리는 책을 골라 읽었다.
책의 앞부분 3분의 1까지만 읽었지만 내용은 대충 죽은 남자친구의 몸을 먹으면서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식이다. 마음에 드는 표현이 몇 개 있어서 중간중간에 메모해놓았다. 예를 들어 '비가 오면 어쩌지. 비가 오면 좋겠다. 아니지, 비가 오면 안 되지.' 같은 구절은 이유 없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나는 좋게 말하면 읽은 글에 영향을 많이 받고, 나쁘게 말하면 표절을 잘한다. 그러므로 이건 언젠가 내가 쓰는 글에 좀 바뀌어서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제 읽었던 소설은 전체적으로 손님들이 많이 먹으면 곤란하니까 일부러 간을 자극적으로 한 뷔페음식과 같았다. 그런 음식은 먹는 중간중간에 물을 마셔야 하듯이 책을 도저히 한 호흡으로 쭉 읽을 수 없었다. 국방부에서 지정하는 진중문고는 장병들의 정신 함양에 도움이 되는 책일텐데도 그런 내용이 있어서 깜짝 놀랐다. 아무리 전쟁이 나고 식량이 떨어져도 죽은 전우의 몸을 뜯어먹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문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내가 읽은 많지 않은 한국 소설에서는 대부분 섹스나 죽음이 등장한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섹스를 통해 삶을 시작하고 죽음을 통해 삶을 마감하므로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강렬한 소재이기도 해서 읽는 동안 정신이 피로해진다. 또는 섹스나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한국 소설에서는 등장인물, 주로 주인공이 고통받는다. 곰곰히 생각해본 끝에 고통의 이유가 사회의 구조적 폭력임을 깨닫는데, 그 과정을 통해 사회의 문제를 고발할 수 있는 것은 좋다만 너무 정신적으로 피로하다. 누가 행복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했던가. 슬픔도 나누어 들면 무겁다. 불특정다수에게 무게를 부과하는 일은 의미있더라도 나는 거기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겁쟁이인 것이다. 기승전결 없이 그저 흘러가는 노래도 있듯이 그런 소설도 있어야 한다. 편백찜처럼 슴슴하지만 은은한 향이 나는 그런 글을 좋아한다.
그런 글은 쓰기가 어렵다. 강렬한 일에 대해 서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수갑이 채워진 죄수가 탈출하는 글을 쓴다고 생각해보자. 먼저 왼손 엄지손가락을 안쪽으로 부러뜨려 꺾는다. 고통의 신음은 입술을 깨물고 참는다. 엉망이 된 왼손을 수갑에서 빼고 오른손목에 걸린 덜렁이는 수갑을 들고 방의 열쇠를 찾는다. 간수가 잠든 사이 창살 사이로 손을 넣어 주머니에서 슬쩍한다. 거기에 중간중간 들킬뻔하는 이벤트들을 추가하면 벌써 재미있는 글이 된다. 그러나 예를 들어 너무 빨리 변해가는 세상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어렵다. 나 같으면 유럽인에 의해 정해진 거주 구역으로 이동해야 하는 인디언이라든지 가상의 인물을 지어낼 것 같다. 모두 아는 내용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어려운데다가 의미도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삶의 대부분 시간은 의미가 없는 법이다. 그런 삶과 같은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