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7일의 기록
나이를 먹으면서 하루는 점점 짧아져왔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적에 나는 세상에서 약 2100일 정도 산 아이였다. 그러므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길이가 0.05% 정도 증가하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을 살아간지 10000일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므로 하루를 살아봤자 인생의 길이가 0.01% 밖에 늘어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1학년 때에 비해 지금의 하루가 5배 정도로 짧아야 타당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느끼기도 한다.
초등학교 때 우리 집에는 빨간 캐비닛이 있었다. 많이 먹는 우리 가족의 식성 때문인지 규모의 경제를 누리기 위해서인지 뭐든지 많이 샀던 기억이 있다. 그 캐비닛을 열어보면 은색 비닐로 싸인 첵스초코라든지 플라스틱 통에 들은 치즈볼이라든지가 있었다. 엄마가 외출을 나갔을 때 집에 혼자 남아서 그런 먹을거리를 몰래 먹는 것이 그 당시 인생의 낙이었다. 양이 워낙 많으니까 어느 정도 먹어도 티가 나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자주 집을 비우면 과자가 차츰차츰 줄어들어 어느 순간 봤을 때 '어, 좀 적은데?' 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정말 눈치를 못 채셨던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넘어가주신건지 한 번도 혼난 적은 없다. 하루의 길이가 줄어드는 것도 과자가 줄어드는 것과 같이 갑자기 눈치채게 된다. 요즘이 나에게는 딱 그런 시기이다. 오늘도 아침에 출근해서 행정 업무를 조금 보다가 10시 반 정도가 되었고, 그 이후에 행정반에 오는 사람들과 조금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오후에는 내내 의무실에 있었는데 4시가 너무 빠르게 되었고 핸드폰을 받고 나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시간이 녹아버렸다.
하루가 이렇게 짧았었나 생각이 들어 행정반 어플을 키면 이제까지 해온 군복무 기간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군대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서 이런저런 방법으로 날짜를 헤아렸었는데, 이제는 딱히 그런 것도 안한다. 요즘은 이런 상상을 한다. 죽을 때가 되어서 사경을 헤매는 마지막 순간에 도깨비가 나타나서 거래를 제안한다. 주어지는 선택지는 '하루를 더 사는 대신 그 하루는 군대에서의 일과를 보내기' 또는 '그냥 원래 수명대로만 살기'의 두 가지다.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전자를 고를 것이다. 내일도 도깨비가 찾아오지는 않을까 기대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이 빨리 가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계절이 바뀌고 큰 단위의 시간을 체감할 때마다 하루하루 죽어간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건 사실이다.
사령부 지침으로 부대의 용사들은 새해 목표를 3개씩 적어서 내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이맘때는 아니더라도 매년 신년을 맞이해서 목표를 세우곤 했다. 보여주기 식이더라도 목표라는 말은 멋진 말이니까. 나는 항상 수학올림피아드 국가대표 되기 등의 거창한 목표를 세웠던 것 같은데, 부모님은 우리 가족의 건강이나 주위 사람 잘 챙기기 등의 안 멋지지만 중요한 목표를 세웠다. 어쩌면 하루의 길이가 나보다 반 이하인 사람들은 그런 목표가 어울릴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도 하루에 30분 이상 글 쓰거나 읽기, 좋은 의사 되는 연습하기와 같은 목표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루가 너무 짧은 탓에 하루가 모인 1년, 나아가 인생도 너무 짧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든다. 하루는 괜찮은 일기를 쓰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라 일기를 쓰지 못하는 날이 많아지는 것처럼, 죽기 전에 적당한 소설 한 편은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