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긴 기도 끝에 응답을 받는다고?

성경독후감 17. 당신은 부모님께 전화드릴 때마다 뭔가를 부탁하고 있나?

by 김은식

교회 안에서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끝까지 기도했더니 응답받았다.”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기도가 부족하면 응답이 늦어진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아야 하는 것처럼 말해지고, 응답은 신앙의 성적표처럼 여겨진다. 응답받은 사람의 이야기는 간증이 되고,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된다. 반대로 응답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혹시 내 기도가 부족했나, 믿음이 약했나, 간절하지 않았나. 그러면 기도는 점점 ‘응답을 얻어내는 방법’이 되고, 신앙은 점점 ‘원하는 것을 얻는 기술’처럼 기울어진다. 이것이 바로 기복신앙이 자라는 토양 아닐까.


기복신앙이란 복을 비는 믿음일 것이다. 그리고 복을 비는 마음 자체가 나쁠 리는 없다. 어린아이가 늘 부모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보채듯,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뭔가를 바라고 매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부모가 아이의 칭얼대는 소리 넘어 진정한 필요를 살피듯 하나님도 우리에게 알맞은 위로와 가르침을 베풀어주시리라 믿는다. 하지만 복이, 그러니까 남들보다 좀 더 많은 나의 물질과 건강과 승리와 성공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된다면, 더 많이 사랑하고 베풀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그래서 다시 한 번 묻게 된다. 기도는 정말 하나님의 결정을 바꾸는 방법일까. 더 오래, 더 강렬하게, 더 끈질기게 기도하면 결과가 달라질까.

예수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태복음 7:7)


이 말씀은 오랫동안 응답을 이끌어내기 위한 기도의 근거가 되어왔다.

하지만 예수는 겟세마네에서는 이렇게도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이 두 장면은 얼핏 모순된다. 한쪽에서는 구하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뜻을 내려놓는다. 그러나 이 두 장면은 기도의 두 측면을 드러내는 지도 모른다. 기도는 내 뜻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놓는 행위일 수도 있다.


이 쯤에서 한 번 상상해본다. 열 살쯤 된 아이가 부모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고 생각해보자. 늦은 밤까지 놀고 싶다거나, 아직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허락해달라고 말할 수 있다. 아이는 자기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열심히 설명한다. 왜 그게 필요한지, 왜 지금 해야 하는지, 왜 친구들은 다 하는데 자신만 허락받지 못하고 있는지 말한다.


대화가 짧을 때는 서로의 입장만 부딪힌다. 달라는 목소리는 칭얼거림으로 늘어지고 안 된다는 결단은 점점 더 크고 거칠어진다. 하지만 대화가 충분히 길어지고 깊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달라지는 쪽은 대개 부모가 아니라 아이일 것이다. 부모는 이미 더 넓은 책임과 시간을 보고 있기에 아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점들을 짚어줄 테고, 아이도 대화를 통해 조금씩 부모의 시야를 배우게 된다.


처음에는 허락을 받아내기 위한 설득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왜 안 되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아이는 자신의 욕구를 조정하고, 더 큰 그림을 받아들이며 부모의 뜻을 이해한다. 그 시간은 부모에 대한 아이의 신뢰가 쌓이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숨김 없이 말하고 부모가 그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며 답하는 과정에서 관계는 깊어진다.


기도도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기도를 오래 하고, 깊이 하고, 끈질기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쪽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기도의 열심은 하나님의 마음을 흔드는 힘이 아니라, 내 마음을 넓히는 시간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더. 엘리야는 왜 그렇게 기도했을까? 열왕기상 18장 41–45절에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넣고 일곱 번이나 기도한다. 그리고 마침내 비가 내린다. 이 장면은 종종 ‘간절한 기도의 능력’으로 인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그 간절한 기도 때문에 내리지 않을 비를 내리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전에 이미 비를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열왕기상 18:1). 엘리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돌려세운 사건이 아니라, 이미 말씀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자리에 경건하게 서는 장면에 가깝다. 엘리야의 간절함은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조급함이라기보다, 그 약속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기다리는 긴장에 가깝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내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그 뜻이 땅에 닿는 자리에 자신을 둔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를 ‘응답받기 위한 기술’로 이해하면, 이런 장면들은 조금씩 다르게 읽힌다. 더 많이, 더 강하게, 더 오래 기도하면 결과가 바뀐다고 믿게 된다. 응답은 곧 성취가 되고, 성취는 신앙의 증거가 된다. 이때 기도는 관계가 아니라 경쟁이 된다. 누가 더 응답을 많이 받았는가, 누가 더 기도에 성공했는가.


그러나 기도의 열심이 하나님을 바꾸는 힘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께 가까이 이끄는 작용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열심의 의미는 거래의 효율성이 아니라, 관계의 깊이를 향한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걸음일 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라면, 그 걸음이 깊어질수록 우리가 붙들고 있던 것들이 조금씩 내려놓아지고, 대신 하나님의 시야가 우리 안에 자리 잡을 것이다.


응답은 상황의 변화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생각의 변화이고, 시야의 확장이며, 마음의 성숙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만이 응답이라면, 겟세마네의 기도는 실패가 된다. 그러나 예수의 기도는 실패가 아니었다. 그 기도 속에서 예수는 아버지의 뜻과 하나가 되셨다.


기도는 반드시 무언가를 얻어내야 하는 과정이 아닐지도 모른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서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그 자리에 머무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응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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