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독후감 16.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는 어떻게 기억됐을까?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단종을 처형한 세조가 선포한다. ‘누구든 그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하리라’. 하지만 단종의 부탁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직접 그의 숨을 거둔 유배지 촌장 엄홍도가 이번에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강물 따라 흘러가던 그 시신을 수습하며 눈물을 흘린다.
비슷한 장면은 역사 곳곳에서 발견된다. 일본 제국은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시신을 은폐했고, 독재자 박정희는 자신을 비판한 이들을 법의 이름으로 살해한 뒤 유족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화장해버리기도 했다.
죽은 자의 시신은 종종 정치적이다. 특히 그 죽음이 어떤 시대의 균열을 드러내고 살아 있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질 때, 시신은 단순한 육체를 넘어 하나의 서사가 된다. 그래서 권력은 때로 시신을 숨기고, 때로는 추모공간을 헐어버리며 기억 자체를 금지한다. 시신이 남는 순간, 그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추모는 곧 계승이다. 먼저 간 이가 이루지 못한 뜻을 이어받겠다는 다짐이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래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출발점이 되고 무덤은 약속의 장소가 된다. 예수의 죽음 역시 그런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었다.
로마 제국에 의해 처형된 한 유대인. 그의 시신이 남아 있었다면, 그리고 그 시신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면, 예수는 아마도 ‘완수되지 못한 해방의 꿈’을 남긴 인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슬픔과 분노를 낳고, 그 뜻을 이어받아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결의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운동으로 남았을 것이다. 무덤은 성지가 되고, 기억은 점점 더 정치적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이루지 못한 것을 우리가 이루자”는 문장이 공동체를 묶는 중심 서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부활이라는 서사가 개입하면서, 이 모든 구조는 근본적으로 흔들렸다.
부활은 단순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넘어 ‘미완의 과업’이라는 틀 자체를 무너뜨린다. 더 이상 예수는 무언가를 이루려다 실패한 인물이 아니다. 그의 삶과 죽음은 어떤 외적 조건에 의해 좌절된 사건이 아니라, 이미 다른 차원의 의미를 획득한 사건이 된다.
그래서 기독교는 독특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특정한 장소나 유해에 의미를 고정시킬 수 없게 만든다. 기억은 과거에 묶이지 않고, 현재로 이동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이루지 못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 있는가’가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빈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아마도 예수를 과거에 고정된 인물로 붙들고 있는 이들일 것이다. 그를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사랑하면서, 그 사랑을 현재의 삶과는 분리해 두는 이들. 혹은 “그의 뜻을 우리가 대신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 속에서 끊임없이 어떤 과업을 짊어지고 있는 이들일 수도 있다. 아무런 맥락도 실천도 없이 ‘예수님 사랑해요’만을 외치는 이들. 그리고 클럽 회원모집 하듯 등록교인 수를 늘려가서 전인류를 개종시키는 것이 사명인 듯 좌충우돌하는 이들. 이들은 어쩌면 여전히 무덤 앞에 서 있다. 비어 있는 무덤을, 마치 무언가 남아 있는 것처럼 지키고 있다.
반대로, 부활을 살아가는 이들은 다른 곳에 있다. 가장 작은 이웃을 대하는 태도 속에서, 타인의 삶을 자신의 것처럼 돌보려는 순간 속에서, 조금 더 낮아지고 조금 더 너그러워지려는 선택 속에서, 예수를 현재의 사건으로 살아내는 이들. 이들에게 예수는 기억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현실이다. 그들의 삶에는 “그가 못다 이룬 것”이라는 문장이 없다. 대신 “이미 시작된 것에 함께 참여한다”는 소명의식이 있다. 부활은 어떤 기적의 증명이기 이전에,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이야기다. 죽음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묶는 대신, 삶의 방식으로 서로를 연결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결국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무덤 앞인가, 아니면 살아 있는 삶 속인가. 그 대답은 고백이 아니라, 오늘 하루의 방향으로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