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독후감 15 바친 아브라함과 바치지 말고 살리라고 명령한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창세기 22:1-13)
여섯 살, 혹은 일곱 살 때였을까? 처음 접하는 순간부터 창세기 22장의 그 장면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믿음의 시험’이라 부르는 이야기 말이다. 나는 이 장면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막연한 이질감이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거부감은 더 분명해졌다. 이해하려 들지 말고 따르라는 요구, 그 자체를 미덕으로 삼는 서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신은 이런 방식으로 인간을 시험하는가.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불편함이 오히려 나를 텍스트로 되돌려 보냈다. 성경을 다시 읽고, 그 이야기가 놓여 있던 역사와 문화의 맥락을 더듬어 보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이 이야기를 그것이 처음 형성되었을 시간 속으로 가져가자, 전혀 다른 풍경이 보였다.
아브라함이 살았다고 여겨지는 기원전 2000년 전후, 혹은 이 이야기가 구전되고 정리되었을 모세와 다윗의 시대에, 신은 본질적으로 두려운 존재였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무력했고, 그 두려움은 곧 신에 대한 공포로 이어졌다. 재앙을 피하고 호의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바쳐야 했다. 그리고 두려움이 클수록 더 소중한 것을 내놓아야 한다고 믿었다. 자녀, 특히 장자를 제물로 바치는 서사가 낯설지 않았던 이유다. 현실에서는 양이나 염소 같은 짐승이 대신 바쳐지는 경우가 더 흔했지만, 그 상상 자체는 당시 세계의 상식에 가까웠다.
이 맥락에서 보면, 아브라함이 늦둥이 외아들 이삭을 바치려 했다는 사실은 그리 특이하지 않다. 오히려 당대의 청중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극적인 것은 그 다음 장면이다. 바로 그 행위를 멈추게 하는 신의 개입 말이다. 제물을 요구하던 신이 아니라, 제물을 거부하고 멈추게 하는 신. 이 지점에서 이야기는 전복된다.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지 않으면 재앙을 내리던 신의 자리에,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고 명하는 목소리가 들어선다.
그래서 이 서사의 중심은 ‘자식을 제물로 바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식을 제물로 바치지 말라고 명하는 이야기’에 있다. 주인공 역시 ‘순종한 아브라함’이 아니라 생명을 멈추지 말라고, 해치지 말라고 명하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요구하는 신이 아니라 멈추게 하는 신, 빼앗는 신이 아니라 돌려주는 신. 이 전환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아브라함의 손에 들린 칼에 시선을 두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그가 얼마나 극단적으로 순종했는지, 그 결단이 얼마나 위대한지에 주목하지 않는가. 그러나 기독교는 본래 인간의 행위에 따라 조건부로 주어지는 보상을 말하는 종교가 아니다. 내가 아는 한, 아무 자격 없는 인간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어떤 삶이 바른가를 묻는 가르침이 기독교다.
이 이야기가 던지는 질문도 거기에 있다. 인간이 어디까지 순종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신이 무엇을 멈추게 하는가, 무엇을 살리려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이해되지 않는 명령 앞에서 침묵하는 것일까, 아니면 생명을 지키려는 더 깊은 의도를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전자는 명령의 출처를 묻지 않기에 광기와 구별되지 않을 수 있고, 후자는 더디고 불확실하지만 결국 인간을 살린다.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니라, 신에 대한 이해의 전환일지도 모른다. 신은 인간의 것을 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서로의 생명을 해치지 못하도록 멈추게 하는 존재라는 전환. 그리고 그 위에서 비로소 가능해지는, 서로를 지키고, 서로를 위해 기꺼이 감당하면서도 끝내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삶.
이 이야기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언가를 바쳐야만 한다는 강박과, 정작 무엇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지를 잊는 일이 오늘도 되풀이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반복 속에서 이 오래된 목소리는 여전히 말을 건다. 멈추라고. 살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