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독후감 13. 불리지 말고, 흐르게 하라. 핑계대지 말고.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팔 수 있는가? 우리에게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은 우리 것이 아닌데 어떻게 팔 수 있다는 말인가? … 우리는 안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함을.”
시애틀 지역에 살던 인디언 추장이 유럽에서 이주해와 땅을 팔기를 강요하는 백인들에게 쓴 편지로 널리 알려진 글의 한 대목이다. 실제로는 후대에 어느 극작가에 의해 창작된 것이라고 하지만, 그 문장들이 담은 생각과 가르침은 여전히 묵직하다.
거래란 서로 가진 것을 바꾸는 일이다. 가지지 못한 것을 거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가지지 못한 것들을 거래한다. 빛, 공기, 바람, 풍경. 혹은 혼자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던 생각이나 느낌들. 그리고 좀더 쉽게 거래하기 위해 온갖 것의 가치를 따져 가격을 매긴다. 그래서 결혼식장에서 밥을 먹으며 신부가 아까운지, 신랑이 횡재를 했는지 수군거리고 많이 기울어진 거래라고 느낄 때는 ‘뭔가 복잡한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힘을 받는다.
그렇게 애초에 누구의 것도 아니었고 누구도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에 경계를 긋고 값을 매기다 보니 삶의 모든 영역에 경계가 생겼고, 그 경계를 지키기 위해 삶의 모든 영역에 상시적으로 경계경보를 울리며 살아간다. 손해 본다는 느낌은 무시당한다는 생각과 이어지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판단은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긴장으로 번져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기도 한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달란트 비유가 떠올랐다. 마태복음 25장이다.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길을 떠난다. 그리고 여러 해 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어떤 종은 그것을 몇 배로 불려서 바쳤고, 어떤 이는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러자 주인은 땅에 묻어두었다가 가져온 종을 책망하고, 그에게 맡겼던 것을 빼앗아 불려온 종에게 맡긴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가로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태복음 25:24–30)”
이 장면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꽤 흔한 난제다. 그 종이 그렇게까지 야단맞을 일을 한 것이 맞을까?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탕진한 것도 아닌데. 주인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그것을 불려보겠다가 날리면 더 크게 경을 칠 일이 아닌가? 다른 종들이야 다행이 순조롭게 달란트를 불렸지만, 현실에서야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우리는 보통 설교 시간을 통해 그 장면의 의미를 이렇게 배운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라. 맡은 것을 두 배로 불려라. 하나님을 믿고 보다 과감하게 전진하라. 그렇게 돈으로만 상상한 달란트 비유는 금세 성과주의의 근거가 되고, 부흥과 대형화를 위한 도전의 용기가 된다.
하지만 그런 해석도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데, 특히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라는 말이 애매했다. 뭔가 주인을 추켜세우는 아첨의 표현처럼 느껴지는데, 의미가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대목의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어떤 의미가 되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면 대략 이런 의미가 된다고 한다.
“당신은 거친 사람이라 당신이 뿌리지 않은 곳에서 거두고, 당신이 흩어놓지 않은 곳에서 모으는 분인 줄 알았습니다”
뿌리지 않은 곳에서 거두는 자는 산적이나 외적 같은 약탈자거나, 아니면 소작농에게 지대를 걷는 착취자다. 그리고 흩어놓는다는 말은 씨를 뿌리는 행위, 모은다는 말은 수확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하니, 그 앞의 표현과 대략 일치한다. 말하자면 저 말은 ‘당신은 아주 엄격하고 무서운 사람이라서’라는 뜻이고, 그래서 저 종은 뭔가 책임 추궁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아예 땅에 묻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말 해, ‘나는 당신이 두려워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라는 이야기.
그렇다면 그 주인이 화를 낸 이유는 아마도 달란트를 불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핑계로 삼는 태도 때문이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라는 반문은, 자신이 과연 그런 사람이라는 인정이 아니라 종의 변명을 무너뜨리기 위한 심문의 도입부였을 테니 말이다.
덧붙여 한 가지 더. 만약 그 달란트가 비유하는 것이 돈이 아니라면 어떨까. 은혜라면. 사랑이라면. 용서라면. 또는 진리라거나 지혜 같은 것이라면. 어쨌든 돈처럼 무언가를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소유하게 하는 물건이 아닌 무언가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그런 것들은 묻어둘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사랑은 쓰지 않으면 식고, 용서는 건네지 않으면 굳고, 은혜는 나누지 않으면 메마른다. 진리와 지혜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머리 속에 고여있을 때는 별 의미가 없지만 나눌수록 풍성해지고 깊어진다. 흘러야 의미가 생기는 것들이다.
그리고 만약 이런 상상이 좀더 예수님이 전하려던 뜻에 가까운 것이라면, 그렇다면 묻은 종의 문제는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을지 모른다. 흘러야 할 것을 흐를 수 없게 했다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그 종은 두려워했다.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묻어두었다. 잃지 않으려고, 안전하게 지키려고. 혹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 핑계를 주인에게 돌렸다. 어쩌면 비난이나 공격으로 들릴 수도 있을 만큼 노골적으로.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시는 것은 움켜쥐어야 할 자산이 아니라, 흘려보낼 때 살아나는 어떤 것들인지도 모른다.
하늘과 땅을 사고팔 수 없듯이, 은혜도 독점할 수 없다. 맡겨진 것은 소유가 아니라 위탁이고, 위탁된 것은 축적이 아니라 순환을 향한다. 달란트 비유는 더 벌라는 명령이 아니라 묻어두지 말라는 경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도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내가 이 땅에 묻어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핑계삼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