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천막을 치는 이유

성경독후감 12. 쌓아두지 말고 나누며 함께 살아가라

by 김은식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레위기 23:42–4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 (신명기 8:2–3)


“절기를 지킬 때에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신명기 16:14–15)


유대인들은 초막절을 지켜왔다. 해마다 가을 어느 날이 되면 집을 떠나 광야로 나가, 편안한 거처와 단단한 벽을 뒤로 하고, 비바람에 흔들리는 초막에서 일주일간 지내는 것이다. 지금도 그들은 멀찍이 광야까지 나가지는 못하더라도 각자 마당이나 아파트 베란다, 주차장, 지붕, 잔디밭, 공공장소 등에 나무판자, 야자수 가지, 짚과 나뭇잎으로 만드는 ‘수콧’이라는 것을 지어놓고 그 안에서 7일 동안 지내거나, 그러지 못하면 최소한 식사라도 그곳에서 한다. 그 기간 동안 학교도 문을 닫고 대부분의 회사들도 쉬거나 근무시간을 단축하며 군인들도 연병장에 만든 수콧에서 생활한다.


이 절기는 단순한 전통이나 재현 행사가 아니다. 초막절은 히브리 민족이 형성되던 시기의 기억을 몸으로 되살리는 훈련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광야로 나섰던 그 출발점을, 해마다 다시 통과하는 의례다. 광야는 그들의 출발점이자 동시에 언제까지나 지켜가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를 품은 원점이다.


물론 히브리인들이 광야에 나선 순간부터 성숙한 모습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7가지 대재앙이라는 하나님의 개입에 힘입어 애굽의 압제를 벗어나 광야로 나선 뒤에도 수없이 압제자가 던져주던 고기와 채소를 그리워하며 멈칫거리고 뒷걸음쳤다. 길을 나선 결단은 결연했지만 자유와 해방과 미래라는 추상적인 이상은 늘 한 끼의 배고픔과 한 순간의 불안 앞에서 너무나 쉽게 무너져내리곤 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분노하고 실망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고, 만나와 메추리를 내려주어 달래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 선물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하루 치 이상을 쌓아두면 썩어버린다는 조건이었다. 내일을 위한 비축은 허락되지 않았다. 부족하면 채워줄 테니 나누며 함께 살아가라. 불안에 사로잡혀 쌓아두려고 하지 말고, 오늘 받은 것을 오늘 함께 나누며 살아가라.


히브리 민족은 애초에 조직된 집단도 아니었고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 것도 아니었다. 오직 애굽에서 노예 살이를 했다는 고통의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고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이 없다는 절박한 생존본능으로 서로 기대며 불안한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는 신분과 계급도 없었고 빈부의 차이도 없었다. 모두가 밑바닥에서 출발한 공동체였다. 물론 가나안 땅에서 정복사업을 시작하면서 땅을 가지게 됐고 복속하는 민족들도 거느리게 됐다. 하지만 광야는 그 평등한 출발점이 유지되던 공간이었고, ‘초심’이 살아있던 곳이었다.


히브리인들은 그 초심의 소중함을 알았던 것 같다. 율법으로, 그리고 절기로 정해 늘 그 자리로 돌아가게끔 만들어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예컨대 그들은 정복사업이 이어지며 땅을 가지게 되었고 그 땅을 지파별로 가문별로 나누었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절대 사고 팔지 못하게 했고 오직 상속만 할 수 있도록 했다.(레위기 25:23) 룻이 죽은 남편의 땅과 함께 보아스에게 가기 위해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여야 했던 이유다.(룻기 3장) 그리고 굶주린 자가 남의 밭에서 포도를 따먹거나 곡식의 이삭을 잘라 먹는 행위는 벌하지 못하도록 했다.


다만 그릇에 담아 ‘챙겨가는’ 순간, 즉 축적으로 전환되는 행위만은 금지했다.(신명기 23:24-25) 그리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신분이 생기고 주인과 종이 나뉘었지만 ‘희년’을 맞으면 모두 조건 없이 해방하도록 하기도 했다.(레위기 25장 10절, 39~41절) 해마다 광야로 돌아가 초막을 짓고 서로 아무 다를 것 없는 빈 손으로 서로에게 의지했던 그 날로 돌아가 1주일을 보내게 한 초막절을 지키게 한 것은 그 종합판이다.


이 가르침은 신약에서 예수에 의해 다시 한 번 분명해진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두 벌 옷도 가지지 말고” 이웃들 사이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를 예로 들며, 불안에 지지 말고 용감하게 이웃과 나눌 것을 명령한다. 그렇게 용감하게 내 것을 나눌 때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는 기적의 출발점이 된다.


이렇게 볼 때,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하나의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하다. 축적하지 말라. 쌓아두지 말고 나누어라.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신앙의 구조 자체에 관한 명령이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미래를 대비해 더 많이 확보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오늘 내게 주어진 것을 이웃과 나누어도 큰 일 나지 않는다고 믿는 태도를 포함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풍경은 때로 이 가르침과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남들보다 더 많이 쌓아 올린 것을 ‘은혜 받은 증거’로 해석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명목으로 자랑하고 장려한다. 합격과 승진, 부와 안정이 신앙의 열매처럼 말해지고 교회는 그런 욕망을 조직적으로 중개하는 공간이 된다. 이 지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여호와에게 끈질기게 적대하던 풍요의 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이방인의 모습과 경계를 조금씩 잃어간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 더 많이 갖기 위한 소망과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한 ‘치성(致誠)’이 되어갈 때 예수님이 좌절하고 하나님이 슬퍼한다. 초막절의 가르침은 바람에 날아가고 광야에서 배운 ‘나눔의 신뢰’는 사라진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불안이며, 그 불안을 달래기 위한 끝없는 축적의 충동이다.


초막절은 묻는다. 왜 우리는 다시 초막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왜 굳이 불편함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 대답은 단순하다. 우리는 너무 쉽게 쌓아두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불안을 달래기 위해,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쌓아두는 삶은 결국 이웃과의 거리를 벌리고 공동체를 해체한다.


신앙은 더 많은 것을 갖게 해주는 기술이 아니다. 신앙은 덜 쌓아도 괜찮아지는 자유다. 그리고 초막은 그 자유를 기억하는 장소다. 해마다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며, 성경은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오래된 대답도 여전히 유효하다. 쌓아두지 말고, 나누며 함께 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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