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궁금해지는 마음은 믿음의 반대일까?

성경독후감 10. 묻고, 변론하라. 그 안에서.

by 김은식

“여호와여 주께서 의로우시므로 내가 주와 변론하려 하나이다. 어찌하여 악인의 길이 형통하며…” (예레미야 12:1)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 20:25)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야고보 1:6)


선한 사람의 고통을 마주할 때, 그 반대편에서 악한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잘 사는 걸 봐야 할 때. ‘주님’으로 시작한 기도가 어느 순간 말을 잃고 그냥 침묵으로 이어지곤 한다. 입술로는 “믿습니다”라고 하면서도, 마음 한쪽에는 풀리지 않은 질문이 남는다.


거창한 신학적 질문이 아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기도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왜 어떤 사람들은 그냥 잘 되는지. 별것 아닌 것 같은 이 질문들을 막상 입 밖으로 꺼내기는 어렵다. ‘믿음이 약하다’는 말을 들을까 봐, 혹은 스스로도 그런 것 같아서, 서둘러 덮어버리게 된다.


믿음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질문은 쉽게 의심으로 치부되고, 의심은 곧 불신으로 매도된다. 그래서 질문은 자라기도 전에 잘려나간다. 그런데 질문이 꼭 의심은 아니다. 의문이 있고 그것은 호기심, 그러니까 관심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더 알고 싶어서, 더 가까이 가고 싶어서 생기는 질문이다. 그리고 설명이 아니라 이해를, 이해가 아니라 관계를 원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질문도 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변론하겠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건 그가 먼저 “주께서 의로우시므로”라고 고백한 뒤에 질문을 꺼낸다는 것이다. 그의 질문은 신앙의 바깥에서 나온 게 아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지금 눈앞의 현실이 더 납득되지 않는 것이다. 등을 돌린 사람의 냉소가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서 있는 사람의 호소다.


도마도 그렇다. 우리는 그를 ‘의심 많은 제자’로 기억하지만, 그는 끝까지 공동체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주님을 향해 있었다. 다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직접 보고 싶다고 했을 뿐이다. 그 요구 안에는 사실 간절함이 있다. 믿고 싶다는, 그래서 확인하고 싶다는 마음. 예수는 그런 그를 밀어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상처를 보여주며 가까이 오라고 하셨다. 질문은 관계를 끊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은 고백으로 이어졌다.


야고보는 조금 다른 어조다. 의심하지 말라고, 흔들리지 말라고 한다. 날카롭게 들린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시련을 통과해 인내가 온전함을 이룬다고 말한다. 믿음은 처음부터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흔들림을 겪으며 굳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고보가 경계하는 건 질문 자체가 아니라, 질문 속에서 방향을 잃어버리는 태도일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던지는 물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냉소 말이다.


나는 이제 질문이 떠오를 때 무조건 눌러 없애기보다, 그 질문의 성질을 먼저 살피고 싶다. 이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마음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더 알고 싶은 갈망인지. 후자라면, 그 질문은 신앙의 균열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점이다. 아이가 부모에게 끝없이 묻는 것처럼, 사랑하기에 묻고, 믿기에 확인하려는 것일 수 있다.


사실 나는 아직도 욥기를 잘 모르겠다. 수없이 읽었고, 여러 해석을 접했고, 많은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마음 깊은 곳의 의문은 완전히 가라앉지 않는다. 왜 그런 고통이 허락되었는지, 왜 침묵이 그렇게 길었는지, 왜 상처는 설명으로 치유되지 않는지. 아니 애초에 일종의 문학작품일 이 책을 누가 어떻게 썼고, 어떻게 정경의 자리에 넣어지고 남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이 욥을 덥치고, 그 고통에 몸부림치는 욥을 향해 친구들은 ‘이 고통의 원인이 된 죄를 돌아보고 고백하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정말 죄가 없다고 항변하며 답을 구하는 욥을 향해 하나님은 ‘내가 세상을 창조할 때 네가 있었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 분은 욥의 죄가 그 고통의 원인이라고 진단하는 친구들의 말이 의롭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다. 너와 함께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내가 읽기에, 욥기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목소리는 이렇다. “내가 만든 질서를 너희가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안에서 네가 던지는 질문은 악하지 않다. 나는 여전히 여기 네 곁에 있다.” 알 듯 말 듯 하다. 쉽지 않다.


하나님을 대면하고 회복을 얻은 뒤, 욥은 자신에게 찾아온 고통의 원인 혹은 의미가 무엇이냐고 절규하던 처음의 의문을 내려놓는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만일 내가 욥이었다면, 회복된 이후에도 문득문득 떠올렸을 것 같다. 그런데 그 고통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더구나 내 가족들에게 찾아온 죽음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 길고 긴 침묵 속의 외로움은 또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질문을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욥기의 난해함은 나를 신앙의 밖으로 밀어내기보다, 더 깊은 곳으로 끌어당긴다. 이해되지 않는 장면 앞에서 멈춰 서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신지 진지하게 묻게 되기 때문이다.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남아 있지만, 그 매듭이 오히려 나를 하나님 쪽으로 고개 들게 한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은 무엇 때문이며, 어떤 의미인가. 욥을 통해 나를 보며 생각하게 한다.


믿음은 모든 의문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의문을 덮어두는 상태는 더욱 아닐 것이다. 예레미야처럼 따지되 등을 돌리지 않고, 도마처럼 확인을 구하되 그 자리에 머물고, 야고보의 말처럼 흔들리되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이야 말로 믿음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신앙이란 확신의 크기로 측정되는 게 아니라, 질문을 안은 채 누구를 향해 서 있는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묻고 있다. 혼란스럽지만 등을 돌리지는 않는다. 해소되지 않은 질문이 나를 하나님 앞으로 계속 데려온다면, 그 질문은 뒷걸음질이 아니라 또 한 걸음의 동행일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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