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독후감 9. 미갈은 정말 하나님의 미움을 받았을까?
왕의 자리에 오르는 일은 언제나 피를 동반한다. 그러나 그 피의 흔적은 종종 기록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남는다.
조선의 원경왕후는 태종 이방원의 아내였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은 헌신했지만 왕이 된 태종은 그의 친정을 철저히 무너뜨렸다. 아버지는 숙청되었고 형제들은 살해되었으며, 가문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별다른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 이후의 왕권을 확립해야 한다는 신념 한 가지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끝까지 왕비의 자리에 남았다. 권력의 정점처럼 보이는 곳이었지만, 그 자리는 승리의 보좌라기보다 고립의 자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들 충녕이 훗날 세종이라 불리는 성군이 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위안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어떤 회복의 장면은 눈으로 목격했다.
성경에도 비슷한 자리에 선 여인이 있다. 미갈. 사울의 딸이자 다윗의 아내다. 그녀 역시 남편이 자기 집안을 무너뜨리며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통과했다. 그 과정에서 사랑했던 남편에게서 떼어져 다른 남자에게 주어졌다가, 권력 재편의 과정에서 다시 "되찾아졌다." 그 되찾음은 사랑의 회복이라기보다 정치적 정당성의 확보에 가까워 보인다. 그녀는 선택한 적이 거의 없다. 결혼도, 이별도, 재결합도. 왕조 교체의 상징물처럼 이동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설교에서 미갈은 종종 그런 맥락과 상관 없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다윗이 법궤를 모시며 기뻐 춤출 때 그를 업신여긴 여인.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따지다 벌을 받은 인물. "그날 이후 그에게 자식이 없었다"는 구절은 그런 그녀의 교만한 태도의 대가처럼 인용된다 (삼하 6:23).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하나님은 그녀를 미워했을까? 그래서 벌을 내리셨을까? 과연 미갈은, 다윗의 아이를 낳고 싶긴 했을까? 자기 아버지를 몰락시킨 남편이, 승리자의 자리에서 환호받으며 춤추고 있었고 그녀는 왕비라는 허울을 쓰고 그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 기쁨은 순수한 경건이었을까. 아니면 왕권이 완전히 자기 손에 들어왔다는 확신의 몸짓이었을까.
사실 성경은 미갈을 길게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사건을 담담히 서술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다윗의 시선으로만 읽고, 다윗을 중심으로 판단한다. 그가 높아질수록 그와 충돌하는 인물은 자동으로 부정적인 인물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왜 다윗을 그렇게까지 위대한 인물로 세워두는가.
구약의 많은 인물들 가운데 다윗은 유독 빛나는 별처럼 소비된다. 목동에서 왕으로, 도망자에서 통일 왕국의 창건자로. 이 서사는 현대인이 갈망하는 성공 신화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작게 시작해 크게 이룬 사람, 선택받아 기름 부음 받은 지도자, 적을 물리치고 영향력을 확장한 인물. 성장과 대형화를 성공의 척도로 삼는 문화 속에서 다윗은 매혹적인 모델이 된다.
그러나 성경 속 다윗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는 용감하지만 잔혹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만 정치적으로 계산적이다. 간음과 살인을 저지르고, 권력을 위해 피를 흘린다. 그의 말년은 장엄한 승리로 닫히지 않는다. 권력 다툼과 가족의 비극 속에서 쓸쓸하게 늙어간다.
많은 학자들이 설명하듯,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는 포로기 이후 편집 과정을 거쳤을 가능성이 크다. 나라를 잃고 돌아온 공동체에게 다윗 왕조는 희망의 상징이었을 것이고, 어느 정도의 이상화는 불가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편집되었을 성경의 본문도 끝내 선을 넘지는 않는다. 밧세바 사건은 지워지지 않고, 우리야의 죽음은 합리화되지 않으며, 압살롬의 반역은 미화되지 않는다. 성경은 다윗을 높이면서도 동시에 무너뜨린다. 완전무결한 영웅으로 마감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을 넘는 것은 오히려 후대의 독자들이다. 설교와 신앙 담론 속에서 다윗은 점점 더 매끈해진다. 그의 성공은 강조되고, 그의 회개는 미담이 되며, 그의 죄가 남긴 상처는 흐려진다. 심지어 반복된 회개조차 "잘못해도 다시 기도해서 용서받으면 된다"는 묘한 면죄부처럼 기능하기도 한다. 은혜의 깊이를 말하려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지도자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장치가 되어버린다.
고고학적 연구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다윗 왕국의 규모와 영향력이 성경의 묘사만큼 거대했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에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가 통치한 영역이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제한적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가 직접 통치한 것은 다윗성에 거주하던 수천 명이었고, 그의 영향력이 미친 범위는 최대한으로 넓혀 인정해도 강원도 정도의 면적을 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역사적 인물 다윗보다, 기억과 신학이 빚어낸 상징적 다윗을 사랑해온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고고학적으로 추정되는 권력이나 영광의 크기가 아니다. 우리가 다윗을 통해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씨름한 인간을 보고 싶은가, 아니면 결국 왕위에 오른 성공한 인물을 보고 싶은가. 미갈의 침묵은 그 질문을 더 날카롭게 만든다.
다윗을 중심에 놓을수록 미갈은 주변으로 밀려난다. 다윗의 춤이 신앙의 모범이 될수록, 그 춤을 불편하게 바라본 여인의 시선은 불신과 독신(瀆神)의 이미지로 해석된다. 영웅을 높이는 동안, 그 영웅의 성공 아래에서 상처 입은 이들의 얼굴은 사라진다.
어쩌면 성경은 다윗을 통해 왕의 위대함을 말하는 동시에, 왕정의 한계를 드러내려 했는지도 모른다. 왕은 결국 인간이며, 선택받았다는 확신도 죄를 면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궁극적 희망은 어떤 인간 왕에게도 둘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런데 우리는 그 긴장을 견디지 못한다. 균열을 메우고, 인물을 더 높이 세우며, 성공 서사를 강화한다. 그 결과 다윗은 점점 더 눈부신 왕이 되고, 미갈은 점점 더 옹졸한 여인이 된다.
어쩌면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정말 다윗을 특별히 사랑하셨는가. 아니면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인간 권력의 한계를 드러내신 것은 아닌가. 그리고 우리는 왜 여전히 성공한 왕의 이야기에 그렇게 끌리는가. 왜 모세, 요셉, 엘리야. 혹은 또 수많은 순박하고 결점이 적은 신앙의 영웅들보다도 앞 자리에 우리는 문제적 인물 다윗을 모셔두는가.
그 질문을 붙들 때, 다윗은 더 이상 신화적 영웅이 아니라 모순과 욕망과 깨짐을 모두 안고 하나님 앞에 선 한 인간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우리도 성공을 희구하는 비루한 야망가의 자리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다. 또한 그 옆에 서 있던 미갈의 슬픈 얼굴도, 비로소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