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독후감 8. 나는 혼자인가? 450명 중 하나인가?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그런즉 그들이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로 가져오게 하고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두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다른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두고 불은 붙이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모든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말이 옳도다.” (열왕기상 18:21–24)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갈멜산에 섰던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은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들은 정말 끝까지 자신들이 옳다고 믿었을까. 아니면 수백 명이 함께 외치고 있으니, 왕이 뒤에 서 있으니, 이 정도 규모와 열기라면 틀릴 리 없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있었을까.
그 자리는 압도적인 다수의 자리였다. 숫자, 권력, 분위기, 집단적 열기. 하루 종일 이어지는 외침과 몸부림. 그 한복판에 서 있으면 의심은 쉽게 고개를 들지 못한다. 마음 한 켠에 스치는 질문이 있었더라도, 곧 주변의 함성에 묻혀버렸을 것이다. 반면 엘리야는 혼자였다. 혼자라는 건 위험하지만, 동시에 숨을 곳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다수의 열기 속에 몸을 맡길 수 없었고, 자기 하나님을 스스로 붙들어야 했다.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오늘의 교회가 떠오른다. 대형 예배당, 잘 준비된 순서, 고가의 장비와 전문가들의 손을 거친 정교한 음향과 영상, 흠잡을 데 없는 진행. 서로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매너와 언어. 그 안에 들어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하니, 이렇게 체계가 잘 잡혀 있으니, 방향은 틀리지 않았을 거라는 믿음이 어떤 안도감을 낳는다.
문제는 크기 자체가 아니다. 세련됨이 잘못이라는 뜻도 아니다. 문제는 다수와 완성된 형식이 나의 성찰을 대신해버리는 순간이다. 감동이 깊으면 신앙도 깊다고 착각하게 되고, 질서가 잘 잡혀 있으면 진리도 단단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 안에서 나는 점점 질문하지 않게 된다. 나는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지금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 있는가. 나는 예수의 제자로서 오늘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은 매끄러운 분위기를 깨뜨린다. 그래서 조용히 뒤로 밀려난다.
내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청소년 시절, 기도 집회에서 강렬한 감동을 느꼈다. 예수님이 정말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내려왔다. 눈물을 흘리며 소리 내어 기도했고, 곁에서 같은 감정을 나누는 친구들이 그렇게 미덥고 소중할 수 없었다. 그 자리가 너무 좋아서 더 많은 다른 친구들도 데려와서 함께 하고 싶었다. 그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어 혼자 있을 때면 복음성가를 반복해 들었고, 더 열정적으로 기도하려 애썼다. 그 시절 주변의 어른들도 비슷했다. 이름난 부흥사를 따라 이 교회 저 교회 부흥회 일정을 챙겨 다니고, 기도원에 들어가 며칠씩 금식하며 더 강렬한 체험을 찾았다.
지금도 종종 ‘첫 마음을 회복하자’, ‘처음 만났던 감동을 되찾자’는 설교를 듣는다. 그 순간들은 분명 진실했다. 그 눈물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아보면, 그 안에는 변화산 위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게 하소서"라고 말하던 제자들의 순진한 미련도 함께 섞여 있었던 것 같다 (마 17:4). 그 자리를 붙들어두고 싶었다. 초막을 짓고 싶었다. 그 감동이 계속되면 신앙도 안전할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러나 예수는 산 위에 머물지 않으셨다. 그분은 내려가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다.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산 위에서 만난 감동의 순간보다는 바로 그 내려감의 결단이었는지도 모른다.
강렬한 체험을 반복하는 동안, 일상의 자리에서 예수를 따르는 구체적인 고민은 뒤로 밀려났다. 교회는 점점 세상과 긴장하며 씨름하기보다, 비슷한 감동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섬처럼 되어갔다. 그 안에서는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따뜻한 관계가 유지되지만, 세상의 복잡하고 거친 현실과 부딪히는 훈련은 줄어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훨씬 단순한 자리에 있다. 많은 사람 속에 있을 때가 아니라. 잘 준비된 예배의 절정이 아니라. 감정이 고조된 그 순간이 아니라.
오늘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이 상황에서 정직을 택할 것인가. 불편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손해를 감수하고도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십자가의 길은 집회장의 열기 속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 속에 놓여 있다.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이 가졌던 안도감, 다수 속에 있을 때 느끼는 안정감, 세련된 형식이 주는 편안함. 그것들은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주지만, 동시에 우리를 무디게 만들 수 있다. 질문을 멈추게 하고, 하나님과의 1대1 대면을 자꾸 미루게 한다.
그래서 생각하건대, 지켜야 할 것은 규모가 아니라 긴장이다. 감동을 누리되 거기에 초막을 짓지 않는 태도. 공동체 안에 머물되,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줄 아는 용기다.
결국 신앙은 언제나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온다. 다수가 아니라, 형식이 아니라, 분위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 마주하는 한 사람. 그리고 그렇게 마주 선 채, 매일 매 순간 현실의 길 위를 걸어가는 곳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