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을 때

성경독후감 7. 너그러운 사람이 되기로

by 김은식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이사야 63:16)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태복음 6:9)


감사를 드리건, 간구하건, 혹은 무언가 답을 구하건 우리의 모든 기도는 대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며 나는 그의 자녀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자녀를 향한 조건 없는 사랑의 마음으로 나의 이야기를 듣고 품고, 능력을 다해 베풀어주실 것임을 믿는 마음 위에서 감사와 간구와 상의를 드리는 것이다.


성경이라는 책을 몇 번을 되풀이해 읽어도 쉽지 않고, 때로는 막막하게 느껴지던 어느 순간에 나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고 종교마다 신이 있지만, 그 신과 인간의 관계를 아버지(부모)와 자녀로 설명하는 방식은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매우 드문 경우기 때문이다. ‘아버지’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의 신명기에서 처음 등장한 뒤 여러 차례 반복되며, 예수 또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이자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부르도록 가르친다.


물론 혈연으로 맺어진 우리의 아버지와 하나님이 동일한 존재일 리 없고, 그 관계의 성격 또한 같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는 까닭은, 우리가 각자의 부모로부터 조건 없이 받았던 사랑과 지혜, 걱정과 돌봄의 경험을 통해—비록 그 크기와 깊이는 다를지라도—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어렴풋이나마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더 나아가, 우리가 부모가 된 뒤 자녀를 향해 품게 되는 마음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또한 한 자락쯤은 헤아릴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 아닐까.


굳이 정신의학이나 교육학의 깊은 연구를 들추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인격과 정서, 사회성이나 감수성 같은 것들이 어린 시절 부모와 맺은 관계의 폭과 성질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은 상식에 가깝다. 그래서 유별나게 독선적이거나 공격적인 사람, 혹은 지나친 불안이나 엉뚱한 신념에 쉽게 사로잡히는 사람들을 두고 흔히 ‘애정결핍’을 의심하게 된다. 반대로 여유롭고 친절하며, 타인의 선의와 가능성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에게서는 ‘충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물론 이것이 절대적인 기준일 수는 없고, 반대의 사례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은 경험이, 자신과 타인과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의미 있는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부모가 없는 사람은 없지만, 충분히 넘치는 사랑을 경험하며 성장한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각자의 불운으로 인해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한 이들도 있고, 또 다른 불운으로 인해 상처 입은 부모에게서 오히려 고통을 받은 이들도 적지 않다. 더 흔한 경우는,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혜가 부족해서 그 사랑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거나, 혹은 자녀의 미숙함 때문에 그 사랑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어긋나버린 부모와 자식들일 것이다. 사랑이란 한쪽에서 쏟아붓는다고 충분한 것이 아니라, 적절한 방식으로 주어지고 받아들여지며 서로 통해야만 비로소 느껴지는, 매우 미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녀가 장성해 곁을 떠난 뒤에야 더 지혜롭게 사랑하지 못했음을 후회하고, 또 부모의 곁을 떠나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기르다가 부모가 늙어 세상을 떠날 즈음이 되어서야 자신이 받은 사랑을 다 알지 못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 매 순간 쫓기듯 살아가던 그때, 사실은 아이를 한 번 더 안아주고 한 번 더 웃게 해주었어야 했음을.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억누르려는 모든 것을 물어뜯고 싶었던 그 시절에도, 부모를 울리고 웃기고 피땀 흘리게 만든 존재가 결국 자신이었음을. 이런 깨달음은 대개 너무 늦게 찾아온다. ‘커버린 자식’과 ‘늙은 부모’라는 말이 유독 코끝을 시리게 만드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크고 완전한 사랑과 지혜와 능력을 지닌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혹은 그렇게 고백한다고 말하는 우리가, 이웃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빼앗기지 않기 위해, 얕보이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처럼 내달리며 살아간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더 나아가, 이웃들 가운데 가장 높고 강하고 귀한 존재가 되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고, 그 기도가 이루어진 뒤에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소망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이 장에 모아놓은 생각들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며 그 아버지가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성경을 읽는 동안 떠올랐던 질문과 사유의 흔적들이다. 성경이 품고 있는 가르침은 넓고 깊고, 공부가 부족한 한 사람의 평신도로서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 가운데 한 줌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 한 줌이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른 길에서 건져 올린 것이라면, 크기와 깊이와는 무관하게 아주 미세한 의미쯤은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었다.


이 책에서 성경의 여러 장면을 다시 읽어갈 때, 나는 계속해서 이 질문으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는 말은, 우리의 삶에서는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가 하는 질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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