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라, 그런데 무엇을?

성경독후감 6. 누군가 나를 절대적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by 김은식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3:16)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12)


기독교인들은 스스로를 ‘예수 믿는 사람’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이웃을 향해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한다.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누군가를 두고 ‘믿음이 좋다’고 칭찬하고, 서로에게 ‘예수를 잘 믿자’고 격려한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가 말하는 ‘믿는다’는 행위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답은 이것이다. 예수라는 인물이 실존했음을, 그가 증언한 하나님이 실제로 계심을, 그리고 예수가 그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뜻.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믿음이라는 게 결코 간단하지 않다.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의 실재를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일이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기원후 1세기 팔레스타인이라는 먼 시공간에서 살았던 예수라는 인물의 실체를 역사적으로 입증하는 일 역시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2천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그 시기는 로마 제국의 식민 통치 아래 수많은 저항과 학살이 반복되던 격변의 시대였다. 칼이 아니라 말로 사람을 변화시키려 했던 한 젊은이에 관한 기록과 유물이 풍부하게 남아 있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당대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스스로를 ‘메시아’라 칭하며 활동하던 인물들이 여럿 등장하고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만나는 예수로 보이는 인물에 대한 설명도 나오지만 성경의 묘사를 교차검증하기엔 부족하다. 그러니 예수의 실존과 그 신성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는 일에는 분명 개인의 결단과 의지가 요구된다.


하지만 그것이 믿음의 전부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허전하다. 어떤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삶 전체를 걸어야 할 신앙의 핵심이라면, 믿음은 지나치게 빈약한 개념이 되고 만다. 그리고 객관적 근거가 없는 일에 대해 더 강하게, 더 흔들림 없이 믿는 것만이 신앙의 유일하거나 가장 중요한 목표라면, 그 믿음은 끝없이 자신을 검열하고 다그치는 긴장 상태로만 남을지도 모른다. 평생을 살아가며 깊어지고 변화되어야 할 믿음이, 단지 ‘의심하지 않기’에 머문다면 그것은 너무 협소하다. 그래서 나는 믿음에 대해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았다.


설명할 수 없는 사정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먼 나라에 보내야 했던 한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사랑이 깊을 뿐 아니라,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지혜롭고 능력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해 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늘 아들의 안위를 살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천성적으로 아둔하고 고집이 세며 이기적인 그는, 이미 넘치도록 주어지고 있는 물질적·정신적 풍요 속에서도 그 안에 담긴 사랑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에는 무감각했고, 갖지 못한 것, 혹은 가져서는 안 될 것에만 집착했다. 스스로를 ‘고아나 다름없는 존재’라 여기며 늘 불평과 원망을 입에 달고 살았고, 작은 손해나 상대적 결핍 하나에도 밤잠을 설칠 만큼 예민했다. 이미 넘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가지기 위해 악을 쓰는 사람이었다.


그런 삶 속에서 배려와 나눔, 희생은 그의 사전에 없었다. 누군가 호의를 베풀어도 그는 그 마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반드시 숨겨진 의도가 있을 것이라 의심했고, 그렇게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어 결국은 곁을 떠나게 했다. 그는 늘 외톨이였고, 스스로 만들어낸 잔인한 생존 경쟁 속에서 허덕였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이며, 이기지 못하는 존재는 도태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을 진리처럼 떠들었지만, 정작 자신을 가장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은 보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두고 흔히 이렇게 수군거렸다.


“저 사람은 아마 부모가 없거나, 아주 심한 학대를 받으며 자란 게 틀림없어.”


아들의 그런 모습을 잘 알고 있던 아버지는, 직접 갈 수 없는 사정 때문에 대신 맏아들을 보냈다. 맏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해 먼 나라로 가 동생을 만났고, 안아주고 입을 맞추며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려 애썼다. 며칠이고 함께 먹고 마시며, 아버지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너를 위해 무엇을 해왔는지를 설명했다. 동생은 몇 번이나 형의 선한 마음을 이용했고, 심지어 형의 지갑에 손을 대기도 했지만, 형은 그것마저 품고 견디며 끝내 동생의 마음을 열고자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은 자신의 뒤틀린 욕망 끝에서 큰 죄를 저질러 처형될 위기에 놓였다. 그때 아버지의 사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형이 그 죄를 대신 뒤집어썼고, 그 희생으로 동생은 목숨을 건졌다. 형의 죽음 앞에서 동생은 큰 충격을 받는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내어준 형의 선택 앞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크고 깊은 사랑 안에서 살아왔는지를 깨닫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랑을 알지 못한 채 부정하며 살아온 자신의 삶, 그리고 그 끝에서 형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감당하기 어려운 죄책감에 휩싸인다.


이제 선택은 그의 몫이다. 아버지와 형 앞에 무릎 꿇고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죄를 마주할 용기가 없어 끝내 그 사랑을 외면한 채 숨어버릴 것인가. 그를 향한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은 무엇일까.


그 아들은 이미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믿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절대적이고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고아처럼 여기고, 세상을 빼앗고 싸워 이겨야만 살아남는 전쟁터로 이해한다. 그런 왜곡된 믿음은 그를 애정결핍 상태로 몰아가고, 결국 자기 삶과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죄에 이르게 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이미 주어지고 있는 사랑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그는 감사할 것이고, 그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결핍이 아니라 충만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과 예수의 실체를 지적으로 승인하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절대적인 사랑이 바로 나를 향해 베풀어지고 있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믿음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전 05화예수의 분노 : 문을 닫는 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