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제자들은 왜 자꾸 엇갈렸을까?

성경독후감 4. 부모는 더 잘난 자식에게 더 큰 것을 주지 않는다

by 김은식

누나는 두 딸이 모두 열 살쯤을 넘어서던 무렵부터 이런 원칙을 세웠다. 아이들 물건을 살 때는 무조건 똑같은 것으로 고른다. 색깔도, 모양도, 크기도, 가격도 같아야 한다. “이건 언니가 좋아할 것 같아”, “이건 동생 취향이겠다” 같은 배려를 어느 순간 포기했다. 그냥 좋건 나쁘건 무조건 똑같은 것으로. 각자를 향한 세심한 배려가 오히려 다툼을 낳았기 때문이다.


“왜 언니 것은 더 예뻐?” “왜 동생 것이 더 커?”


모양과 크기와 색깔의 차이가 사랑의 차이로 해석되는 순간, 집안은 전쟁터가 된다. 그래서 누나는 차이를 지워버렸다. 필요보다 동일함을 택했다. 생각해 보면 그 선택은 서글픈 타협이다. 각자에게 더 어울리는 것을 줄 수도 있었지만, 사소한 시기심 때문에 조카들은 각자 더 좋은 것을 누릴 기회를 스스로 빼앗아버린 셈이다.


부모의 마음은 더 잘난 자식에게 더 큰 것을 주는 데 있지 않다. 어려서부터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고 말썽 부리지 않고 공부 잘 해서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 얻은 자신이 조금 더 좋은 것을 물려받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순전히 자식의 생각이다. 부모에게 중요한 것은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다. 똑같이 떡 한 개씩을 주는 게 아니라, 밥투정하느라 한 끼 굶은 자식에게 떡 두 개를 주는 것이 부모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어쩌면 그런 장면에서 빗겨나온 것이 아닐까도 싶다만, 그래서 때로는 ‘너는 공부 잘 해서 좋은 직장이 있지 않니’라며 못난 동생에게 더 큰 것을 주는 부모를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자녀가 사랑을 비교의 언어로 이해하고 야속해한다면, 별 수 없이 부모는 필요가 아니라 균등을 선택하게 된다. 무조건 똑같이 나누어주기로 하면서, 부모는 자식 몰래 짧은 한숨을 쉰다. 나는 복음서를 읽으면서 가끔, 지금은 다 커버려 그 시절을 기억조차 하지 못 할 두 조카의 얼굴을 떠올린다. 예수와 제자들이 자꾸 엇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아서다.


우리는 공정함을 사랑한다. 특권 없이, 차별 없이,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는 일은 분명 소중하다. 그것은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정의다. 그러나 우리의 공정 감각이 언제나 그렇게 맑지만은 않다. 그 속에는 비교와 불안이 섞여 있다.


“나는 충분히 받고 있는가.” “혹시 누군가 나보다 더 사랑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불안이 공정이라는 이름을 입는 순간, 우리는 사랑을 분배표 위에 올려놓는다.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일꾼들은 분노한다. 늦게 온 자와 똑같은 한 데나리온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 오래 일했으니 더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묻는다.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 20:15)

이 질문은 계산의 질서를 흔든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과급 체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은혜는 공로의 비율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제자들은 이 질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품삯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마르다는 말한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눅 10:40)

그것은 사랑의 공정성을 묻는 질문이다. 왜 나만 더 일해야 하는가, 왜 나만 덜 사랑받는가.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의 형도 항의한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기며 계명을 어기지 아니하였거늘…” (눅 15:29)

나는 더 했다. 그런데 왜 저 사람과 같은 대우인가. 그들의 분노는 정의감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사랑의 부족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우리는 흔히 성경을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의 선언이 아니다. 욥기 8장에서 욥을 정죄하던 친구 빌닷의 말이다. 그는 고난당하는 욥에게, 네가 바르게 살면 결국 더 크게 될 것이라고 충고한다. 그 말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실은 조건부 보상의 논리다. 지금이 비참한 것은 뭔가 잘못되었기 때문이고, 올바르면 나중에 더 많이 받을 것이라는 계산. 하나님은 그 친구들의 말을 옳다고 하지 않으신다(욥 42:7). 그런데 우리는 그 문장을 아무렇지 않게 가져다 축복의 도구로 쓴다. 지금은 충분하지 않다고 전제하면서, 미래의 확대를 은혜라고 부른다. 은혜를 현재의 숨결이 아니라 앞으로 얹힐 추가분으로 상상한다.


아무도 공기를 두고 다투지 않는다. 누가 더 많이 숨 쉰다고 해서 질투하지 않는다. 공기는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다르다. 누가 더 복을 받았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흔들린다. 왜 저 사람인가, 왜 나는 아닌가. 은혜를 희소한 자원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가까이 왔다고 말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막 1:15)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물었다. 누가 더 큰가. 우리가 무엇을 받겠는가. 언제 회복하실 것인가. 예수는 충분하다고 말했고, 제자들은 미래에 더 크게 돌아올 제 몫을 기대했다. 그 엇갈림은 지금도 반복된다. 어쩌면 신앙의 성숙이란 더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충분하다는 사실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부모의 사랑이 경쟁의 자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 형제의 차이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공기처럼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품삯을 계산하지 않는다. 예수와 제자들이 엇갈린 이유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버지의 집에 살면서도 여전히 품삯을 계산하는 일꾼처럼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 엇갈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이미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이미 충분하다. 그 충분함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계산을 내려놓고 그저 아버지의 집에 머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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