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독후감 3. 천둥이 아닌 바람의 소리로
예수는 노동자였다. 목수의 아들이었고, 그 자신도 어린 시절부터 톱밥과 흙먼지 속에서 나무를 다듬으며 자랐다. 그는 학교에서 길러진 사람이 아니었고, 궁정의 우아한 언어를 익힌 사람도 아니었다. 시장의 소음, 작업장 한 편에 펼쳐놓은 새참 보자기 위에서 나누는 거친 웃음, 작업장의 땀 냄새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말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둥이 아니라, 곁에서 들리는 땅의 언어였으리라.
그는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지중해 건너편 그리스 철학자들이 발전시켰던 수사학의 영향을 받은 흔적은 거의 없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뱉은 한두 문장으로 상대를 멈춰 세웠다. 정면으로 공격하지도, 길게 변명하지도 않았다. 대신 상대의 말 안에 들어가 그 말을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었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사람들이 늘 먹고 마시기를 일삼는다며 탐식자라고 비아냥대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요한은 먹지 않는다고 귀신 들렸다고 하고, 나는 먹는다고 탐하는 자라고 한다.” (마태 11:18–19)
두 장면을 나란히 놓아놓고, 비난의 본질이 요한도 예수도 아니라 비난하려는 마음 그 자체라는 것을 사람들 스스로 깨닫게 했다.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고 비난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왜 필요하겠느냐.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 아니냐.” (마태 9:12)
이 한마디로 논쟁은 끝난다. 상식 하나로 비난을 위해 비난하는 이들의 도덕적 우월감을 무너뜨렸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고 비난받았을 때는 물었다.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마태 12:11)
율법 자체를 공격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일상적이고 상싱적인 삶을 가져와, 종교가 삶을 위해 있는지 삶이 종교를 위해 있는지 스스로 묻게 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냈다는 음모론이 제기되자 그는 더 압축적으로 말했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 아니냐.” (마태 12:26)
상대의 논리 안에서 모순을 찾아 그 논리를 무너뜨렸다. 이 말투는 위엄 있는 설교도, 철학자의 논증도 아니었다. 시장에서, 밭에서, 작업장에서 오가는 짧고 때로는 퉁명스러운 말이었다. 요즘 한국에서라면 ‘충청도식 화법’이라고 불렸으리라.
그는 비유를 즐겨 썼다. 씨앗과 밭, 잃어버린 양, 포도원 품꾼,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 모두 사람들이 매일 보는 것들이었다. 그의 세계는 추상 개념이 아니라 손으로 만지는 현실로 가득했다. 그는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았다. 옆에 서서 말했다.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기록한다(요한 1:14). 이 말은 단순히 신이 인간의 몸을 입었다는 뜻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의 말투를, 인간의 억양을, 시장과 식탁과 길거리에서 오가는 그 언어를 입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가피한 방편이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말과 글의 도움 없이 각자의 영으로 직접 가르침과 명령을 꽂아 넣을 수 없는 분이었으랴.
그리고 그렇게 예수가 입은 말투의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질문이었다. 예수는 설명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질문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엇을 믿으라고 장황하게 설파하지 않았다. 대신 한 문장으로 되물었다. 그 질문이 상대의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일하게 만들었다.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왜 필요하겠느냐.”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 아니냐.”
이 질문들은 단순한 반박이 아니다. 상대의 논리가 모순에 이르고 그 안에서 스스로 무너져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하는 방식이다. 소크라테스가 스스로를 산파에 비유한 것처럼, 예수의 질문도 사람의 새로운 생각을 ‘받아내는’ 도구였다. 더구나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순수한 사유의 장에서 이루어졌다면, 예수의 질문은 삶의 현장에서 벌어졌다. 종교적 권위, 체면, 이해관계, 악의와 편견이 뒤엉킨 자리였다. 그래서 그의 질문은 더 짧고, 더 둔중하며, 빈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이해하지 말고 순종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해하지 못한 채 복종하는 태도를 흔들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한마디는 단순하지 않다. 상대를 판단 능력이 있는 존재로 대우하는 태도로 읽힌다. 그래서 나는 신앙이 설명을 멈추는 지점이 아니라, 질문이 시작되는 지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질문은 사람을 작게 만들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책임 있는 존재로 세운다. 모순을 드러내지만 사람을 제거하지 않는다. 생각을 부수되, 사람을 부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질문은 공격이면서도 초대다. 무너뜨리지만 동시에 새로 세운다.
만약 성육신이 인간의 언어를 입은 사건이라면, 이 질문의 방식 또한 그 일부다. 신은 인간 대신 생각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생각하도록 세우는 존재로 다가왔다. 그래서 예수는 교리를 주입하는 교사가 아니라, 삶의 모순을 바로 세우는 질문자로 남았다.
그의 말은 천둥이 아니라, 곁에서 속삭이는 바람이었다. 사람들은 그 한마디 때문에 분노하며 스스로 무너지기도 했지만 또 어떤 이들은 웃기도 하고, 멈춰 서기도 하고, 때로는 삶을 바꾸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저 높은 곳 어딘가가 아니라 늘 우리 곁에 서서 말하는 분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