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통독, 이의 있습니다

김은식의 성경독후감 1. 연재를 시작하며

by 김은식

나는 모태신앙인으로 자랐고, 성경을 비교적 성실하게 읽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나는 평일에는 3장 주일에는 5장씩 읽어나가 해마다 성경을 한 번씩 통독한다는 규칙을 꾸준히 지켜나가는 교회 모범생이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그 규칙을 지켜나가는 동안 역시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부모님의 신뢰와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혹시 100만큼 야단 맞을 일을 했을 때도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아이니까’라는 믿음 속에 10 정도로 스치듯 지나가곤 했으니, 나름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일단 습관이 된 뒤에는 크게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읽어낸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기에 어떤 문장에 매여 끙끙댈 이유도 없었고, 그저 눈으로 글자들을 훑고 지나치면 됐기 때문이다. 물론 자려고 누웠다가 오늘 성경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라 다시 불을 켜고 앉아야 할 때는 좀 귀찮았지만, 시간으로 따지자면 3장을 읽어내는 데 시편 같은 곳은 1분이면 될 때도 있었고 긴 곳도 10분을 넘길 일은 거의 없었다. 레위기나 민수기 같은 곳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사사기 같은 곳은 꽤 재미 있었지만, 읽는 속도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고 또 군대에 가고, 사회인이 되면서 중간에 몇 년씩 거르기도 했지만 또 문득 생각나면 돌아와서 다시 통독을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평신도로서는 비교적 적다고는 할 수 없는 통독 경험을 가지게 됐다.


그런데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또 그 날의 숙제를 하기 위해 성경을 펼쳐 읽는데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가을 쯤이었고 분명히 성경책의 중간은 한참 넘어간 어딘가를 읽고 있었음에 분명했는데, 내가 읽은 곳을 표시해두던 빨간 줄이 한참 앞 쪽의 구약 어딘가에 끼워져있었던 것이다. 누나가 어느 연합 찬양 집회에 참석한다며 내 성경책을 빌려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래서 대략이라도 원래 읽던 곳을 찾아서 다시 읽으려고 뒤적이는데, 도저히 어느 권이었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태복음이었는지, 마가복음이었는지 … 아니, 누가복음이었던 것도 같고. 또 대충 되짚어 읽다 보니 지난 달 쯤 읽었던 곳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누나에게 쫓아가서 왜 빌려 간 남의 성경책을 원래 상태 그대로 돌려주지 않느냐고, 누나 때문에 일년 내내 지극정성으로 지켜나가던 통독의 진도를 잃어버렸다고 화를 냈다. 그 때 한동안 듣고 있던 누나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어디쯤 읽었는지도 모르면서 꾸역꾸역 읽어나가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냐’고 질타했는데, 그 앞에서 나는 말문이 탁 막혔다.


그 뒤로 조금 더 집중해서 읽고 새기려고 노력하긴 했다. 또 그 때의 기억을 곱씹으며, 다섯 번 정도 통독을 마친 뒤에는 1년에 한 번씩 읽겠다는 욕심 대신 ‘조금 느리고 깊게’ 읽자고 마음먹기도 했다. 하지만 읽는 속도가 달라져도 ‘통독’을 목표로 하는 한 늘 숙제를 해가는 마음은 같았고, 그것을 꿋꿋이 해내는 동안 신앙적 성실함에 대한 자신감이 더욱 단단하게 쌓여갈 뿐이었다. 성실함에 대한 자신감이라는 것이 혹시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해보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을 여러 번 읽은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나는 이 책에서 어떤 것을 배웠고 느꼈고 또 어떤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졌는가? 불분명했다.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내가 성경을 여러 번 읽었다는 사실에 대해 칭찬했고 자신들은 또 몇 번씩 성경을 읽었는지 이야기했지만 자신들이 배우고 느끼고 생각한 것과 나의 것은 어떻게 같고 또 다른지 나누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무슨 책이든 감명 깊게 읽은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인물의 선택을 두고 논쟁하고, 한 장면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으며, 어떤 사건 속에서 어떤 인물이 마주한 어떤 순간에 공감하고 분노하고 안타까워하는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오늘의 삶에 무엇을 비추는지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성경을 읽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많이 읽고, 그렇게 오랜 세월 읽어오면서 늘 품에 품고 애지중지하고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끼리 매주 만나서 교류하면서도, 성경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거의 본 적이 없다. 대신 정해진 해석을 반복하거나, 암송하듯 구절을 나열하거나, 읽어냈다는 성취 자체를 신앙의 증거처럼 간직하고 때로는 자랑하거나 칭찬할 뿐이다.


나는 30대 초반부터 40대 중반까지 입시학원과 방송에서 논술을 가르쳤다. 지금도 글을 쓰면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글쓰기를 가르친다.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에는 물론 책읽기에 대한 조언도 포함된다. 그런 나의 경험에 비추어본다면, 사실 ‘통독’ 자체를 장려하고 자랑하고 칭찬하는 건 어떤 책을 읽는 좋은 방법은 아니다. 읽었지만 이해하지 못하고 소화하지 못한 채 페이지를 넘기는 책 읽기, 텍스트와의 긴장이나 대화를 회피하거나 포기한 독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낸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해 끝까지 읽어내는 일.


그런 독서는 독자를 성장시키기보다 오히려 책과의 거리를 더 벌려놓는다. 소통하지 못한 책을 끝내 읽어냈다는 엉뚱한 성취감은 오히려 그 책을 나중에라도 읽을 가능성마저 막아버리며, 사실 아무 것도 알거나 느끼거나 사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허구적인 자신감을 가지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 자신감은 허구적인 것이며 허망한 것이다.


성경은 예외일까? 성경은 인간의 말이 아닌 신의 계시가 담긴 것이어서 그저 몇 번이고 반복해 눈으로 훑어내리는 노력만 쌓아 올리더라도 충분히 그 뜻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일까? 나의 생각은 다르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고 전해진 말씀이며, 말씀은 나의 이성을 통해 이해되고 감동되고 그것을 통해 생각이든 느낌이든 변화될 때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읽어냈다는 성취감 자체로서 나를 고양시키는 것이라면,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모를 주문을 외우며 염주알을 굴리는 것과 무엇이 다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이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성경을 ‘통독해야 할 책’이 아니라, 대화해야 할 텍스트로 다시 읽어볼 수는 없을까? 신학 전공자의 설교라는 권위적 해석을 통해서만, 혹은 제자반과 양육반과 통독커뮤니티 같은 정해진 질서와 프로그램 안에서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평신도가 자신의 이성과 감정, 삶의 경험을 동원해 읽고, 느끼고, 질문하고, 때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성경 앞에 서는 것은 정말로 잘못된 일일까?


나는 교회의 질서나 기존의 신앙 교육 방식을 거부하지 않는다. 많은 교회들이 공동체를 유지하고 신앙을 전수하기 위해 애써왔고, 그 노력 덕분에 나 역시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다만 나는, 하나님과 관계 맺고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고양한다는 일이 그 질서 안에 머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해석을 성실히 따라가는 신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읽고,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기도하며 중심을 세우는 신앙 또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여러 개의 언어를 건너온 번역의 한계를 돌파할 능력이 없고, 또한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부분을 이해할 안목을 가지지 못한 한 사람의 평신도로서 가지는 불충분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거야 그 한계를 인정하고 수많은 신학자와 설교자와 가까이 있는 교역자들을 멘토 삼아 보충해가면 되는 것이 아닐까.


이 글들은 정답은커녕 조금이라도 권위를 가질 만한 해석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한 평신도가 성경을 읽으며 남긴 사유의 흔적이다. 신학적으로 정교하지 않을 테고,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지거나 때로는 너무 얄팍한 지식과 사유의 깊이에 코웃음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들이 누군가에게 ‘성경을 이렇게 읽어볼 수도 있겠구나’라는 힌트가 된다면. 그래서 자신이 성경을 읽으며 생각하고 느끼고 궁금해한 것들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일깨우게 된다면 그로써 이 글들은 제 역할을 다한 셈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성경에 대해 가르치거나 성경 읽기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아주 오래 이어져 온 것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성경과 소통해보자는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