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대학교 학우연재 1189호
“오, 놀라워라! 이 얼마나 훌륭한 인간들인가요! 인류는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오 멋진 신세계여, 이곳엔 그러한 사람들로 가득하구나!”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셰익스피어의 소설 『템페스트』 5막 1장의 대사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은 열정적인 독자라면 이 대사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기억에 남는 감명 깊은 소설 속 대사를 하나씩은 마음 속에 품고 있다.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와 같은 마음을 울리는 대사는 짧은 글귀로 인생을 함축적으로 담아 내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문학은 고단한 삶의 단비와도 같다. 무미건조한 개인의 삶을 풍성하게 가꾸어 준다.
훌륭한 인문학적 예술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감수성’이 필요하다. 소설을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소설 속 배경을 그려내고, 인물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의 격렬한 감정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인문학적 감수성을 함양하는 것은 개인의 삶에 한층 더 윤택하게 해 준다. 최근 인문학 열풍이 부는 것도, 바쁜 직장인들이 출퇴근길에 시간을 내어 소설을 읽고 인문학 영상을 보는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키우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학문적 감수성을 계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인간에 관한 학문인 인문학은 세상을 바라보는 수많은 방식의 하나일 뿐이다. 인문학적 감수성이 인간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라면, 학문적 감수성은 모든 감각 기관을 동원하며 머리와 가슴으로 세상을 지각하는 것이다. 세계에 질문을 던지고 그에 답하기 위한 노력과 결과 모두 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다양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 취미 생활을 예로 들어 보자면,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 등 다양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 셀 수 없이 많다. 세상에 대해 던지는 질문도 그러하다. 사물의 운동과 에너지에 흥미를 보이는 사람, 생물의 다양성에 경탄하는 사람, 인간의 정신을 탐구하고 싶은 사람, 자원의 희소성과 그에 따른 선택을 궁금해하는 사람 등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세상에 다양한 형태의 질문을 던지는데, 이러한 질문들이 바로 학문적 감수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적 감수성이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면, 학문적 감수성은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어줄 수 있다. 학문적 감수성으로부터 연유한 생기 넘치는 호기심은 기나긴 인류의 역사에 걸쳐 우리 사회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우리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산업혁명, 디지털혁명, AI로 우리는 수백 년 전에 비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학문적 감수성은 어떻게 키워야 하는 걸까? 일반인들에게는 학문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기에 학문적 감수성을 함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대학생의 경우에는 다르다. 오랜 시간 학문에 정진해온 지식인들을 매일 강의를 통해 만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즉, 교수님들은 강의를 통해 학생들에게 자신이 가르치는 학문의 본질은 무엇인지, 어떤 점에서 흥미로운지 그 누구보다도 자세하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이다.
충남대학교는 학문의 기초를 배울 수 있는 다양한 강의를 제공한다. 기초수학, 생물학, 경제의 이해 등 학문적 감수성을 계발할 수 있는 쉽고 훌륭한 강의들이 많다. 배우고 싶은 분야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강의를 들어보고, 용감하게 질문해 보도록 하자. 호기심이 가리키는 길을 부단히 걷다 보면, 어제와는 다른 세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