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2025.04.28
박 교수님께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항상 열정적으로 강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빈틈없이 자세하게 설명해주신 덕분에 어려운 해석학 과목을 훨씬 수월하게 공부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조언해주신 방식으로 공부해보니 조금씩 감을 잡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 기초 중의 기초를 막 배운 참이지만, 수학적 논리의 전개 방식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된 것 같습니다. 혹자는 공부를 하는 데 있어 암기가 중요한지, 이해가 중요한지 논쟁하고는 하지만, 진지하게 공부를 하는 학생이라면 구태여 두 가지 방식 중 어느 하나가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 방식 모두 중요한 과정이며, 서로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외우면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이해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외움으로써 인식의 경계를 차츰 넓혀나갈 수 있습니다. 왼발로만 걸을 수도 있고 오른발로만 걸을 수도 있겠지만, 두 발이 있다면 왼발을 내딛고 오른발을 내딛은 다음 다시 왼발을 내딛는 방식으로 걷는 것이 더 편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등미적분학 이외에도 기하학, 선형대수학, 통계분석기법 등을 수학과에서 듣고 있습니다. 수학이 경제학에 필요하기에 왔지만, 경제학과는 분명히 다른 짜릿한 재미가 느껴집니다. 특히 공리적 체계와 유클리드 기하학을 배우는 민 교수님의 기하학 강의가 특히 흥미롭습니다. 플라톤이 자신의 저서에서 기하학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찬미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분기하를 배우면 분명히 재미있는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수학과에 너무 늦게 들어와서 들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아쉽습니다.
경제학은 사회과학이기에 수학적 모형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무언가에 얽매일 수 밖에 없지만, 수학은 인간의 지성이 족쇄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분야입니다. 수학의 본질은 그 자유로움에 있다는 칸토어의 말은 분명히 핵심을 관통하는 말입니다. 어떤 황당한 아이디어라도 그것이 황당하고 이상하다는 이유만으로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어서는 안되며,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독창적이고 과감한 아이디어는 지적 돌파구가 될 가능성이 있을 수 있기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수학과의 학구적인 분위기는 오히려 경제학과보다 더 마음에 드는 것 같습니다. 경제학과의 일부는 지나치게 수학적 도구에 매몰되어 경제학이 어떤 학문인지 잊어버리거나, 수학적 도구를 경멸하여 훌륭한 수학적 도구조차도 모두 몰아내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경제학과는 분명 특이한 학문입니다. 수학, 철학, 사회학, 역사학 중 어느 한 분야에만 지나치게 뛰어나면 훌륭한 경제학자가 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Keynes가 자신의 스승인 Marshall에 대해 쓴 글에서 주장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훌륭한 경제학자라면 인간의 선택을 이해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적합한 수학적 도구를 유연하고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알며, 자유 의지(volition)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경제학의 이론은 어떤 경우에도 자연과학의 절대불변의 진리 법칙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람들의 사회, 나아가 경제 전체를 잘 설명할 수 있도록 특정한 신념과 사상만을 고수하지 않고 가장 훌륭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 이론을 끊임없이 발견해야 하며, 이론적인 경제 이론이 정책으로 수행될 때 현실의 한계를 감안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사회적 후생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며 어디에 있는지 파악할 수조차 없는 Equilibrium을 찾아 그 균형을 유지하는 줄타기 곡예사와 같은 중용의 미덕을 갖춘 기량이 필요한데, 이는 실용적이고 유연하며 동시에 독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매우 희소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저는 응용생물학과로 처음 19년도에 들어왔으나, 생명의 신비보다는 언제나 인간의 선택과 그 결과를 이해하는 것을 더 열망했기에 경제학과로 전과했습니다. 그렇기에 저희가 살아가는 국가 전체에 큰 관심이 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지속가능성이 우려됩니다. 오래전부터 지속되어온 문제도 존재하고, 비교적 최근의 문제도 존재하지만 모두 국가의 존속을 위협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들입니다. 저출산, 법의 지배, 표현의 자유, 기술경쟁력의 저하 등 문제가 많지만 가장 중요하며 심각한 문제는 교육입니다.
대한민국만큼 대학 진학율이 높은 국가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지만, 고등학교 교육과정과 대학 교육과정 모두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류의 지적 경계는 나날이 팽창하지만, 한국의 교육과정은 나날이 수축해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수천억원 대의 미국의30년 채권은 매입하면서, 더 확실하고 대체할 수 없는 장기 인적 자본 투자인 교육에 무관심하다는 것이 제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현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수학을 등한시한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여러 가지가 존재합니다. 첫째, 심화 대학수학과 그것을 주로 활용하는 경제학, 공학, 자연과학 등을 배우는 데 필수적인 미적분, 기하와 벡터, 통계와 같은 분야가 필수가 아니게 되어 점점 축소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입니다. 이런 교육과정으로는 대학에서 추가로 시간을 들여 고등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수학을 교육해야 하는데, 이것은 대단한 인력과 시간의 낭비입니다. 대학에서는 필수적인 교과목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박사 학위 소지자가 사칙연산을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사칙연산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사소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칙연산을 더 잘 가르쳐 줄 수 있는 다른 교육자가 있음에도 시간을 들여 교육해야 하기 때문에 비교우위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아 비효율성이 발생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학생들이 수학에 대해 적대감을 갖게 만듭니다. 제가 친구들에게 수학과에 가서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을 짓고는 합니다. 대학교에 오고 나서는 수학에 발조차 들이지 않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대학수학을 접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대학수학은 계산기를 두드리는 단순 계산 학문이라고 착각하는 학생들도 많아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계산은 그저 수학의 한 일부일 뿐이며, 공리적 체계 내에서 합의된 규칙을 통해 유의미한 정리들을 연역해낼 수 있는 지성의 항연을 체험해볼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스마트폰, 무선 통신, 인공지능의 세계에 살면서 수학의 유용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수학교육이 분명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셋째, 수학은 하나의 천재만이 필요한 학문이 아닙니다.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가 누구도 해내지 못할 지적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수학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 쓰일 수 있습니다. 이는 수학이 언어의 특성과 도구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재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수학이 비로소 쓸모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학부생 대학 수학이라도 진지하게 공부한다면, 경제학과 자연과학을 포함한 거의 모든 학문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지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면 능히 대학 수학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타인의 지적 발자취를 따라가는 학부생 공부는 시간 투입 싸움입니다. 밥을 삼켜 소화하듯이 지적 발견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가우스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우스만큼의 지적 능력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그렇다면 아마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가르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역사학, 문학과 같은 분야는 노력한다고 해서 나아질 수 있을지 모르는 분야입니다. 연습한다고 스스로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쓰거나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사회라는 걸출한 역작을 쓸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재능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아르키메데스의 정리는 약간의 지적 능력과 꾸준한 연습이 동반된다면 배울 수 있고, 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천재와 수재를 위한 자리가 모두 있다는 것이 수학의 강점입니다. 천재는 출현하는 것이지만, 수재는 길러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회 조직에서는 한 명의 천재보다 실무에 사용할 수 있는 많은 수재들이 필요합니다. 대한민국의 대학 교육은 인적 자본을 축적한 경제활동인구를 더 길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수학은 추상적인 사고 능력과 방식 그 자체이기 때문에, 수학을 배우면 불필요한 것들을 추려내고 필요한 것들만 뽑아내 사고할 수 있는 문제해결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AI가 노동이라는 생산 투입요소의 대체요소가 될 지 보완요소가 될 지 알 수 없지만, AI의 알고리즘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학입니다. 알고리즘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추어놓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만약 특이점에 도달한다면 AI가 스스로 알고리즘을 만들어 자신을 개량하거나 다른 AI를 생성해낼 수도 있지만, 그때가 된다면 어떤 직업도 존속 가능성을 보장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AI가 생태계를 황폐화시킬 수 있는 전략 무기로 동족과 끊임없이 싸우는 인간이 계속해서 존재해야 할 이유에 대해 회의감을 가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대학 입시는 불필요한, 잘못된 방향으로의 경쟁을 부추겨 지적 발전에 쓰여야 할 소중한 경제적 자원이 비효율적으로 배분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수능을 더 본다고 해서, 수학 가형의 21번과 30번을 더 잘 푼다고 해서 수학 혹은 타 학문을 공부하는데 직접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능 공부는 선별을 목적으로 하는 시험을 더 잘 보기 위한 훈련이며,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것은 필요 이상의 숙달과 반복이기 때문입니다. 대학의 서열이 경제 주체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떤 국가에서나 사실이기에 경쟁이 과열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국가의 잠재력을 잃어버릴 정도로 과열된 것 같습니다. 경제적 인센티브의 잘못된 설계로 인해 미래의 공학자, 과학자가 훨씬 더 나은 보수를 주는 의과대학으로 가버리고, 설령 훌륭한 과학자가 탄생한다고 하더라도 사상의 자유, 학문의 자유와 더 나은 사회경제적 보수를 제공하는 다른 국가로 직장을 옮기거나 이주해버리는 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분명 훌륭하고, 독창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잠재력 넘치는 학생들이 존재하나 사회 분위기로 인해 억압받거나 소외되는 경우도 있어 보입니다. 예전과 비한다면 놀라운 수준으로 자유로워졌지만, 아직도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 독특한 사람은 이상하고 따라서 배척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폐쇄적인 분위기가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국가의 지적 발전과 물질적 번영에 기여하기 위한 인재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는 단순히 경제적 보상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특이하더라도 그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 즉 다름을 인정하고 관용의 자세를 베푸는 자유주의적인 사회 분위기가 필요합니다. 경제적 보상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정치적 동물인 인간은 누구라도 타인의 존중과 인정을 갈구하며, 모두에게 배척당할 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기 마련입니다. 시대를 대표하는 독창적인 사상가는 일반적인 사람이 이해할 수 조차 없는 사고방식을 가지기도 합니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제거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가능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저희가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살아가는 사회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빵을 좋아하는 사람, 떡을 좋아하는 사람,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 사업을 좋아하는 사람,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 등 다양한 선호를 가진 사람들이 이 사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인적 풀의 다양성이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성장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사는 사회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가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 아테네 학당에 모인 그리스인들처럼 모두 대화만 하며 토론한다면, 그 이론을 기술로 만들어 현실에 적용시킬 사람도, 농림어업에 종사해 필수 재화를 공급할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선호에 맞추어 서로가 비교우위를 가지는 직업에 종사함으로써 분화와 전문화의 이점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경제학이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이라는 질문에 던져주는 유익한 통찰입니다.
따라서 저는 사회의 다양성을 존중할 것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것이 올바르기 때문이라는 윤리적인 견해를 표출하지 않고도, 그것이 물질적인 번영과 지적 발전의 필요 조건이 된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주장을 옹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오르그 칸토어가 신의 개념인 무한에 도전했다고 해서 공격받은 일이 정당화될 수 없으며, 에바리스트 갈루아가 모든 게 자명하기 때문에(trivial)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오만불손한 태도를 견지한다고 해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조국을 위해 헌신한 앨런 튜링이 동성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업적에 걸맞지 못한 대우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자유주의 전통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자연법과 법의 지배 하에서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유는 대부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 세계에서 그러한 자유주의 전통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자유의 땅임을 자처한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법의 지배(rule of law)를 파괴하고 법을 통한 지배(rule by law)를 행하기를 갈망하는 듯 보이며, 번영의 씨앗인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도널드 J. 트럼프는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유대인 교수를 모두 내쫓고 난 괴팅겐 대학교에는 더 이상 수학 같은 건 없다고 비판한 힐베르트의 말처럼, 어느 날에는 경제학이 사라진 프린스턴 대학교, 공학이 사라진 MIT도 보게 될 날이 올 지 모릅니다. 지성이 족쇄에 붙들린다면, 오늘날과 같은 지적 발전 속도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것이 자명합니다. 저는 이런 퇴행적인 경향이 대단히 우려스럽습니다.
지속가능한 국가, 사회적 후생의 증진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 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마 삶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방법을 강구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민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도 개인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타인에게 공부는 수단이지만, 저에겐 공부는 목적 그 자체입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그것을 어디에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흥미롭고, 다른 어떤 것도 저에게 그러한 즐거움을 가져다 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공부를 해서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가 아니라, 무엇이 되어서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막연한 생각만이 있을 뿐입니다. 교육자, 연구원, 사서, 공무원, 직장인, 자영업자... 무엇이 되든 할 수 없는 공부도 있겠지만 할 수 있는 공부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사람 앞 날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을 배웠기에, 명사나 형용사가 아닌 동사, 어떠한 행동 즉 공부라는 것만을 목표로 할 뿐인 듯 합니다.
적다 보니 말이 너무 길어진 것 같아 문서로 따로 작성했습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아래는 개인적인 질문인데, 황당한 질문인 것 같아 따로 부록으로 남깁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최승혁 올림
완벽히 디지털 세계에 복사된 세계가 있다고 가정하자(연산 능력과 하드웨어 저장 용량의 한계는 감안하지 않는다, 인간의 인식 내부와 바깥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세계라고 가정한다). 0과 1로 모든 것이 표현될 수 있는 세계가 존재한다면(,
Q1. 그 세계는 단순히 가상 현실에 숫자라는 방식을 이용해 다르게 표현했을 뿐인 세계인가, 아니면 숫자로 표현된 세계가 사실은 세계의 이데아와 같은 진실한 형태인가?
Q2. 만약 숫자로 표현된 세계가 진실한 형태라면, 지금의 세계 역시 가정했던 대로 다른 세계에서 0과 1을 통해 연산으로 만들어진 세계인가?
Q3. 만약 그렇다면, 연산으로 만들어진 세계는 연산을 수행한 세계와 정확하게 같은가(=), 혹은 크기가 작거나 같은 부분집합으로 파악할 수 있는가? 마치 Nested Set Property처럼.
Q4.
연산해서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 안에서 연산을 해서 세계를 만들고.....이 과정을 무한히 반복해나가면 결국 어느 순간 연산된 세계는 공집합(無라고 가정하자, literally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이 되는가?
Q5. 위 질문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첫 번째 세계는 어디서부터 연산되었는가? 연산으로부터 탄생한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그것이 존재한 것인가?
Q*(Economics): 완벽히 세계를 정확하게 무수하게 복제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자연과학처럼 엄밀한 반복 실험을 통해 유의미한 결과를 얻고 이론을 증명할 수 있을까? e.g. 어떠한 확률론에 기반한 재정정책 거시모형을 검증한다고 가정하자. 거시계량이론을 바탕으로 한 완벽한 정책을 어떤 국가에서 시행하는 상황을 만들어 그 정책이 입안된 직후의 상황과 완벽하게 같은 세계를 무수히 복제해서 나타난 정부지출의 승수효과의 기댓값이 재정정책 거시모형의 예측값과 정확히 일치한다면, 그 이론을 다른 자연과학의 이론처럼 어떠한 법칙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Q(Ethics): 만약 이러한 세계를 자유자재로 만들고 또 삭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가정하면, 연산된 세계 속 인간은 시뮬레이션 속의 하나의 데이터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동등한 자연권을 누릴 수 있는 사람으로 봐야 하는 것일까? 복제된 사람은 복제된 시점에 정확히 같은 사람으로 봐야 하는가? (e.g. 최승혁(세계 a) 최승혁(세계 b)?) 윤리적으로 경제학적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서 완벽히 똑같은 세계를 무수히 만들고, 또 무수히 파괴해도 될 수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