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회인 Aug 18. 2023

선생님 하숙집에서 하룻밤

  초등학교 때였다. 상급생들과 함께 고전 읽기 전국 경시대회를 준비하던 때였다, 


  어린 시절 겨울에는 눈도 참 많이 오고 문고리에 손이 딱 달라붙을 정도로 추웠다. 그날도 밤늦게까지 도서실에서 책을 읽는데 그야말로 밖은 온통 하얀 백설 천지로 변했다. 다른 사람들은 누군가가 다 데려가고 나 혼자 남았다. 이십 리 산길을 걸어서 집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때 독서지도를 해주시던 담임 선생님이 학교 근처의 하숙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선생님은 갓 부임하신 예쁜 여선생님이었다. 평소 좋아하던 선생님 방에 가본다니 숨이 막힐 정도로 긴장도 되고 꿈만 같았다. 누나가 없던 내게 선생님 방은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 방 그대로였다. 예쁜 꽃들을 수놓은 하얀 커튼이 쳐진 작은 방은 참 따뜻했다. 


  선생님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여기서 자고 내일 함께 학교에 가면 된다고 하셨다. 따로 깔아준 이부자리에 들어가 숨을 죽이며 눈이 소복하게 쌓이는 소리를 듣던 순간은 시간이 멈추어 있는 듯했다. 따뜻한 방바닥의 온기와 풀 먹인 솜이불 홑청에서 전해오는 바스락거리던 감촉이 지금도 선명하다. 


  이듬해 봄, 선생님은 다른 학교로 전근 가셔서 두 번 다시 만나지를 못했다. 어린 시절 선생님께서 나를 유난히 예뻐하고 집에까지 데리고 가 재워주신 것은 참으로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가끔 지칠 때마다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선생님 옆에서 아무 걱정 없이 잠들고 싶을 때가 있다. 문밖에는 그때처럼 세상의 근심 걱정은 하나도 없이 흰 눈만 소복하게 쌓여 백설 천지가 될 것이다. 


  몇 해 전에 북경 유리창(琉璃厂) 거리에서 화랑에 들렀던 적이 있다. 그때 눈 내린 집의 대문 정경을 그린 그림 한 점을 보았는데 어린 시절 선생님 하숙집과 너무 닮았다. 그 그림을 꼭 사고 싶어서 몇 번이고 물어보았지만 조그만 그림 한 점 값이 내 여행경비 전체보다도 비쌌다. 다음날 다시 가서 흥정해 보았지만 결국 사지 못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후회가 된다, 


  내가 벌써 정년퇴직했으니 선생님은 아마도 백발 할머니가 되셨을 것이다. 그때 선생님 하숙집에서 눈이 소복하게 쌓이는 소리 듣던 나를 쓰다듬어 주셨던 선생님이 그립다.

이전 01화 삼장고개 쇠똥구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