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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인 Aug 30. 2023

품격이란 무엇인가

  수요일 저녁마다 예산에 있는 추사학당으로 대금을 배우러 다닌 적이 있다. 나이 먹은 할배들이 모여 처음으로 대금 소리를 내보는데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처음에는 열 손가락으로 지공 여섯 개를 제대로 막지 못하여 애를 먹었다. 


  한 달 가까이 대금과 씨름을 했는데도 청아한 소리는커녕 김새는 소리만 났다. 왜 사서 고생을 할까 싶어 포기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떠올렸다. 문득 선생님 손을 보니 소도둑놈 같은 내 손의 반밖에 안 돼 보였다. 저렇게 작은 손으로도 하는 데 그거 하나 못하랴 싶어 오기로 버텨보았다. 그러다 아예 소리가 나든지 말든지 포기하는 심정으로 입김을 불어넣었다. 신기하게도 조금씩 대금 소리 비슷한게 나기 시작했다. 


  대금의 매력이라는 게 마른 대나무에 구멍 몇 개를 뚫어 놓은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무슨 리드나 장치도 없이 호흡으로만 소리를 만드는 악기다. 그야말로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단순한 악기다. 그래서 어떤 기교나 화려한 장식음보다 가슴속에서 나오는 간결하면서도 깊은 호흡이 필요한 악기요, 나처럼 단순하고 무식해야 잘 어울리는 악기다.


  대금 수업을 받으러 다니면서 허기도 때울 겸 즐겨 찾던 식당 한쪽에 세한도 액자가 걸려 있었다. 평소에는 무심히 지나쳤는데 대금 소리가 터진 날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보니 세한도가 주는 간결하면서도 절제된 품격이 어쩐지 대금 소리와 진배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 선생께서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당시 그곳을 두 번이나 찾아온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문인화다. 추사는 거친 붓을 들어 그의 의리와 인품이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가장 늦게 낙엽이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와 같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고 표현하였다. 세한도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나왔다.  


  우리나라 국보 중에서 세한도만큼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숨겨진 것도 드물다. 이상적은 스승의 그림을 북경으로 가져가 당시 청나라의 열여섯 명에 이르는 명사들로부터 찬시(讚詩)를 받아 그림 끝에 붙였다. 세한도는 이후 여러 사람의 글과 감상문 등이 이어져 완성되었다. 


  후대에 세한도는 북경의 한 골동품점에서 추사연구자이자 일본 교수였던 후지즈카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이후 이를 알게 된 서화 수집가 손재형이 일본까지 찾아가 무릎이 닳을 정도로 매달린 끝에 다시 찾아왔다고 한다. 후일담에 당시 세한도가 보관되었던 건물이 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모두 불타 없어졌다고 하니 이때 세한도를 찾아오지 못했다면 영영 사라졌을 것이다. 


  지금이야 제주도 가는 것이 비행기 타고 한 시간이면 족하지만 백오십여 년 전 목선을 타고 거친 파도 속에서 제주도까지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했을 것이다. 당시 추사는 형조참판에서 쫓겨나 유배 중이었다. 이런 스승을 제주도로 두 번씩이나 찾아간 이상적이 아니었다면 세한도는 애당초 태어나지 못할 국보였다. 또한 전 재산을 들여서라도 일본 땅에서 이를 찾아오고자 했던 손재형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 진심을 헤아리고 돈 한 푼 받지 않고 평생의 소장품을 기꺼이 내준 후지즈카가 없었다면, 세한도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품격이란 돈이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지위가 높다고 해서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대금도 마찬가지다. 막힘없이 매끈한 기교보다는 간결하고 절제된 호흡이 더 중요할 것이다. 


  추사고택에 가야겠다. 대금을 들고 가 뒤뜰 백송 아래서 불다 보면 혹시 원하던 소리가 나올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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