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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인 Sep 07. 2023

깨진 계란 한 개

  도시계획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명망 있는 교수가 있다. 풍기는 인상을 보면 누가 봐도 금수저로 태어난 게 분명해 보인다. 가끔 만나 술을 한잔씩 나누다 보니 속에 있는 이야기까지 털어놓았다. 그 친구의 얘기를 듣고 보니 사람은 겉모습만 봐서는 안 된다는 말이 역시 맞다. 


  그 친구가 파리에서 유학할 때다. 집이 어려워 유학 갈 형편이 안 되었는데 프랑스 정부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고 했다. 그 당시 외국환 송금도 자유롭지 않았지만 사실 집에서 유학비용을 넉넉하게 보내줄 형편도 안 되었다고 한다. 몇 년간 갖은 고생 끝에 드디어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을 때다. 귀국을 앞둔 아들을 보러 어머니가 파리에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데 먹을 게 똑 떨어졌다고 한다. 수중에 남은 돈도 없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딱 계란 한 개가 남았다고 한다.


  이틀만 있으면 한국에서 어머니가 오니 그냥 기다렸단다. 건너편 집에서는 졸업 기념 파티가 열린 듯 시끌벅적하였다고 한다. 먹을 것도 떨어진 참에 기웃거려 볼까 생각했지만 구걸하는 것 같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그냥 굶어보기로 했단다. 그 친구는 세상에서 그렇게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을 처음 느꼈다고 했다. 


  이틀간 물만 먹고 참았는데 마지막 날 아침이 되자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단다. 아껴 둔 계란 한 개를 꺼내 들고 이걸 어떻게 요리해서 먹을까 고민하다 몸이 휘청거리며 그만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고 한다. 그 교수는 계란 한 개가 그렇게 소중해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나도 그랬다. 오래전에 학생들을 인솔하여 1달간 어학연수를 간 적이 있다. 필리핀 세부였는데 내 숙소는 제법 이름 있는 호텔이었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돈이 있건 없건 마찬가지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한 달이나 그렇게 비싼 호텔에 있기는 너무 아까웠다. 그 돈을 아껴 학생들한테 밥이라도 한 번 더 사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루 종일 호텔 주인을 기다린 끝에 협상을 다시 했다. 리조트 쪽 건물의 구석진 방으로 옮겼는데 반값밖에 안 된다. 계약기간을 남겨두고 귀국한 일본인이 쓰던 방인데 취사도 가능했다. 그 사람이 다시 오면 방을 비워준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제공하지 않으니 아침밥을 직접 해결해야 했다. 택시 대신 동네 지프니를 타고 대형 마트에 갔다. 지금 생각하면 궁상맞은 짓이었지만 그때는 외국에서 단돈 1달러라도 허투루 쓰는 것이 그렇게 아깝고 무서웠다. 찾아간 마트에는 한국 식품도 있었지만 너무 비쌌다. 결국 1리터짜리 우유 한 통, 계란 한 판을 사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 두 가지가 그나마 가장 저렴하고 먹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부터 한 달 내내 계란을 사다 먹었다. 필리핀 계란은 모두 하얀색이다. 심심하여 하얀 계란에 눈동자도 그려 넣고 일련번호나 요일을 써보았다. 청소하러 온 아떼(아줌마)는 무슨 실험을 하냐고 웃는다. 나는 21번째 계란에서부터 하루에 병아리가 한 마리씩 나올 거라고 놀려주었다.


  귀국을 앞두고 계란이 떨어졌다. 이틀이 남았으니 서너 개만 더 있으면 되는 데 어디 가서 빌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른 아침에 골목을 서성이다 과일을 팔러 다니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베개같이 커다란 과일이 있었다. 잭푸릇(Jackfruit)이다. 값을 물어보니 계란 값이나 그게 그거였다. 결국 남은 이틀은 그 커다란 초록색 베개 같은 열대 과일을 뜯어먹으며 보냈다. 과일값이 그렇게 저렴한 줄 알았으면 계란 대신 한 달 내내 과일이나 먹고 살 걸 그랬다. 


  요즘 퇴직 후에 펜션에서 일하고 있는 분을 가끔 만난다. 가장 힘든 일이 뭐냐고 했더니 음식쓰레기 치우는 일이란다. 멀쩡한 음식을 통째로 버리는 일이 허다하다는 것이다. 죄짓는 것 같아 버릴 수도 없고 가져다 먹을 수도 없어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계란 한 개까지 세면서 아껴 먹던 때가 떠오른다. 입에 들어가는 것마저 아끼던 시절이었지만 계란 한 개만 있어도 부자였던 그리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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