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염려증

by 금경

책상 위에는 굵은 사인펜과 붉은색 볼펜이 대 여섯 개 놓여 있다. 쓰다 만 헌 공책에 쓴 앞으로 해야 할 리스트 하나하나를 체크하기 위해서다. 공책에는 X표, O표, 삼각부호, 괄호 치기 등이 빼곡하다. 어떤 목록들은 한데 묶이어 Imp, Soon, Next가 표시되어 있다. 공책 한 페이지의 맨 아래에는 능생능멸(能生能滅)이 적혀 있다. 리스트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잘 이루어지길 바라는 확언이다.


라이프 리스트장으로 활용된 공책들이 늘어간다. 헌 공책들은 거의 소진되었고 새 공책을 사다 쓸 지경이 되었다. 다이어리 공책들을 살펴보니 같은 내용을 여러 번 쓴 것들이 점차 늘고 있다. 이미 이루어진 것들도, 사라진 것들도 되풀이된 것이 있다. 가령 세면대 밸브 구입교체, 화장실 경칩 구입교체, 금속 강력접착제 구입 및 시도, 장롱 문고리 구입교체, 새로 산 안방 TV의 거치대 구입 등이다. 엔진오일 교체, 작은방 창호교체는 기간이 적혀있고, 머리 커트, 병원 약 타기는 Soon으로 '국가 건강 검진 하기'의 날짜는 새로 든 보험보장 개시일을 감안하여 특정 날짜 이후로 적혀있다.


리스트 내용이 완성될 때까지 수시로 점검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거에 비하면 사뭇 다른 양상이다. 이건 분명 노화의 징후로 여겨진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당면한 최우선 과제만 염두에 두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시간과 기일을 놓치기 일쑤였다. 설령 놓쳤다 하다라도 약간의 부담으로 쉽게 처리하였다.

헌데 최근에는 아주 사소한 일들에 대한 이행여부를

꼼꼼히 챙기기 시작하고 이가 끝날 때까지 마음을 점령하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

효험이 있다는 어떤 건강식품도, 약도 각종 콘텐츠를

찾아서 체험후기를 보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종합해 보면 일종의 강박, 불안증세의 일종으로

자가진단 한다.

당장 필요한 것으로 보여도 시간이 지나서 보면

천천히 하거나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무엇 보다도 머지않은 장래에 해야 할 일에 대한 생각이 많다.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자신과 아내의

건강 부분이다. 내 경우는 현재로서는 그럭저럭 조절이 되는 편이지만 아내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복용하는 약의 종류가 늘어나고 강도가 높아간다.

더욱이 의사가 표준진료의 측면에서 제시하는 처방은 가히 위협적이다. 며칠, 몇 달의 기간으로 병원을 찾아야 할 스케줄이 줄줄이 잡혀있다.


며칠 전에는 Mri를 촬영한 결과, 향후 추적검사를

해야 한다는 진단은 우울하게 만든다. 70대 이후에는

치료계획의 주체가 본인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리 달갑지 않다.

"그리 잘 아는 의사 자신은 왜 아파?"하고. 애써 무시하여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 해야 할 일에 더하여 건강검진 체크일을 수시로 반복하는 일 또한

불안장애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절체절명의 사실은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다. 인생 최후의 종착지는 화장지일 것이다. 엊그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유일한 화장지

앞 길을 자동차로 지나가게 되었다. 과거와 다르게 출입구가 훤하게 넖혀졌다. 특별한 경우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나와 나의 처는 앞에 보이는 저 화장터에

고객으로 진입할 것이다.

요즘 화장터가 부족하여 먼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한다. 라이프 리스트에 화장지 예약하기를

하고 싶어도 그 날짜를 특정할 수 없으니 그것은

아무래도 자식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죽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리 죽을 필요는 없을 터.


이제 생활 리스트 작성 좀 작작해야겠다. 생활목록 작성에 대한 되뇜은 전체적으로 보아 강박적인 건강염려증이다. 나이가 들면 제일 먼저 파괴되는 것이 고귀한 정신세계라 했거늘 그 징후를 생활목록에서

목도한다.

소박하게 대충 하자.

x표와 o표로 만!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열을 가하면 부피가 팽창하는 공간에 살고 있는 우리 존재임 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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