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이 둥근 탓

by 제로진

어제 우리나라와 가나의 축구 경기를 봤다. TV 화면 가득 찬 녹색의 잔디밭을 보면서 경기 시작을 기다리는데 어찌나 긴장이 되던지. 가슴께가 간지러운 기분 좋은 설렘이라기 보다는 심장 위에 남의 신발을 얹어놓은 것 같은 답답스런 긴장감이었다... 그 감정을 속절없이 느끼며 '차라리 국적이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국적이 없었다면 이 경기를 꼭 이겼으면 싶은 절실함도 사라질 것이고 이기든 지든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공이 오가는 게임의 흐름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스포츠를 스포츠로 즐길 수 없는 나 자신이 왠지 억울하게 느껴지면서 하물며 축구경기에서마저 내 나라라는 이유만으로 한 국가를 맹목적으로 응원하게 되는데 더 큰 명예나 잇속이 달린 일에는 인간들이 오죽했을까? 싶어졌다. 이게 다 국가라는 개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다... 이토록 고리타분한 국가관과 국수주의를 없애기 위해서는 국가의 구분이 없어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휘슬이 울렸다. 경기가 시작됐다.


경기는 흥미로웠고 선수들은 열정적이었고 승부는 예측 불가했다. 하지만 암만 열정적으로 임해도 묘하게 안 풀리는 날이란 게 있다. 결정적인 전환점들은 때로 생각보다 사소한 얼굴을 한 채로 씨익 웃는다. 허무할 정도다. 확실히 운명의 신은 실력보다 운의 편에 가까운가 싶을 정도로.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판은 아닌 것 같을 때, 오늘은 정말이지 날이 아닌 것 같을 때, 이젠 정말 끝이 분명할 때. 그럴 때라면 어느정도 선에서 운명과 타협하고 주저앉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근데 정말로 후반전 끝의 끝의 끝까지 공으로 돌진하는 저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왜 사람들이 투지와 열정에 환장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결과야 어떻든 간에 주어진 환경에 저항해서 뜻하는 바를 드러내는 것이 한 편의 행위예술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한 편으로는 아무리 몸부림쳐봤자 폭주기관차처럼 달려오는 패배라는 놈에게 장렬히 치이고야 마는 건 똑같으니 차라리 몸이라도 사리는 게 나은가 싶고 말이다.


가끔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저 작은 공을 정확하게 차고 또 골대를 출렁이게 만드는 게 21세기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길래 다 큰 성인남성들이 저렇게까지 진지하게 임하는가 싶었지만, 이제는 저 모습이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삶이란 과제의 축소판인 것만 같다는 생각이다. 제 멋대로 굴러가는 공을 어떻게든 현란하게 드리블하여 원하는 곳으로 보내고 싶지만 내 발은 영 말을 듣지 않는다. 내 편과 남의 편은 구분 지을 것도 없이 모두 지들 멋대로다. 게다가 가끔은 머리털이 없고 가끔은 콧수염이 많고 가끔은 임채무를 닮은 삶의 심판자가 내게 레드카드를 주기도 하고 말이지. 하지만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달려야 한다... 그게 멋진 건지 옳은 건지 돈을 받기 때문에 그래야 하는 건지 이왕 볼을 차기 시작한 김에 제대로 해보고 싶은 열정이 있어서인건지는 모른다. 이 모든 게 이유가 될 수도 있고 이 중에 이유가 없을 수도 있다.


왜 달려야 하는지도 모르고, 왜 이겨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이게 다 공이 둥근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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