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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Sep 16. 2024

혼과 5분 후의 혼

24대 1이었다. 


혼은 혼자 24명 모두를 상대하고 있었다. 혼은 24명의 반 아이들 앞에서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런 혼의 모습을 보면서 24명 아이들은 더 약이 오르는 것 같았다. 24명은 혼, 한 명에게 쩔쩔 메고 있었다. 다른 반 아이들도 이런 상황을 신기해하며 7반 교실문 앞에 몰려들었다. 사마귀, 동성, 요가, 나 또한 그들 중에 섞여 있었다.      


대충 싸우는 얘기를 들어보니 2학년 7반은 가정시간 과제였던 조별 미션에서 반 전체가 실패한 것 같았다. 아무도 혼을 자신의 그룹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그것으로 그룹 결성 자체가 막혀버린 것이다. 가정샘은 7반은 화합 자체가 되지 않는다, 그것으로 이미 실패한 것이라며 앞으로 이런 일이 계속되면 조별 미션 태도 평가에 감점이 있을 수 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7반 반장 영주는 제대로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러나 혼은 당당했다. 자신은 최선을 다하려고 했었다고, 너희는 내게 기회조차 준 적이 없다며 너희들은 이기적이다, 너희들 때문에 나까지 피해를 봤다, 며 반 전체를 비난했다. 어떤 답도 내지 못하고, 아마 앞으로도 쭉 해결책도 없이 그렇게 7반 모두가 다 힘든 시간을 겪게 될 것 같았다.      


단체 체육시간. 체육관 안에서 2반 5반, 7반이 함께 배구공 던지기 연습 시간을 가졌다. 혼은 구석에서 배구공을 벽에 튕겨가며 혼자 던지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혼과 배구공을 주고받으려는 아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양마리. 저기 봐봐.”

사마귀가 손으로 체육관 2층 관람석을 가리켰다. 체육관 2층에서 밑을 내려다보고 있는 혼이 보였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배구공을 혼자 구석에서 튕기고 있는 혼을 보았다. 나는 두 손으로 눈을 비벼대며 사마귀에게 물었다. 

“사마귀…… 내 눈 지금 이상한 것 같은데.”  

“정상이야.”

다시 눈을 똑바로 뜨고 체육관 2층의 혼과 땅에 있는 혼을 보았다. 

“혼…… 제 죽은거니?”

“아니.”

“그럼 나…… 죽은거니?”

“아니.”

“혼…… 제…….”

“두 개네.”

“누가 진짜야?”

“모르지.”      


6교시 마지막 수업을 끝난 후 등나무 벤치로 유가가 우리를 불러 모았다. 유가는 다소 흥분한 것 같았다. 

“알아냈어. 우리가 스템프 범인이라고 소문내고 다니는 인간!”

4층 복도 끝 컴퓨터 실. 우리는 불도 켜지 않고 몰래 들어와 11번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누른다. 11번 컴퓨터 내장하드에 과거 문서 기록들이 지워지지 않은 채 저장되어 있었다. 양마리와 스템프, 라는 한글 파일 제목이 학교 게시판에 올라온 제목과 똑같았다. 인터넷 사용 기록을 확인해보니 우리 학교 홈페이지,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가 대부분이었다. 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은 1학년 미유, 2학년 혼, 3학년 나주 선배 밖에 없다.      


드르륵…… 컴퓨터 실 문을 열린다. 누군가 컴퓨터 실 안으로 들어선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그의 얼굴이 드러난다.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혼. 유가가 혼에게 묻는다.  

“넌 우리가 훔쳤다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 거지?”

“내가 쓴 글이 아니야.” 

“이렇게 빤히 증거가 있는데도?”

“내가 쓴 게 아니라니까.” 

“그럼 누가 쓴 건데?”

“…….”

망설이는 혼을 보며 사마귀가 묻는다. 

“배구를 보고 있던 너 말고…… 배구를 하고 있던 너가?”

“……맞아. 나는 나와 5분 후의 나로 갈라져 있어.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마 사마귀. 이젠 나도 한계에 이르렀으니까.”  

“고칠 방법은?”

“없어. 고칠 이유도 없고. 5분 후의 나도 나일 뿐이니까.”  

“언제부터?”

“8살. 부모님 이혼하고 나서부터.” 

“…….”

“싸우고 이간질하고 모함하는 모든 건 5분 후 내가 한 짓이야.” 

말을 하고 나서 어이가 없다는 듯 혼이 혼자 웃었다. 

“내가 왜 이런 걸 너희들한테 얘기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쓸데 없이. ……너희는 이해 못해. 겪지 않고서는 절대…….”

사마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알 것 같은데…… 일어나기 싫은데 일어나야 하고 공부하고 싶지 않은데 해야 하고 학교가기 싫은데 가야하고…… 그럴 때 내가 찢어지는 것 같던데.” 

동성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먹고 싶은데 절대 먹으면 안 될 때 너무 괴로워…… 그럴 때랑 비슷한 거 아니야?”

나도 그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을 때 근데 좋아하기 때문에 아예 다가가고 싶지도 않을 때. 혼에게 사마귀가 말을 건넨다.

“혼, 이해가 되는데 어쩌나…….”

“헛소리하지마.” 

횅 컴퓨터실을 나가버리는 혼.      


그 주 목요일 날 혼은 사라졌다. 학교 정문 씨씨티비에 혼이 학교를 빠져나간 모습은 찍히지 않았다. 학교 안에서 혼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혼은 사물함, 신발장, 옷장, 교복…… 에 붙어 있는 자신의 이름을 모두 지워버리고 교실과 기숙방 책상 위에는 책 한 권 남겨두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모두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는 학교 안팎을 뒤지며 혼을 찾기에 사력을 다했다.      


나는 담임샘의 허락을 맡아 야간 자습 시간에 상담실로 향했다. 환한 상담실은 문이 열려 있었다. 누가 언제라도 이곳에 들어올 수 있게끔 일부러 문을 열어둔 것 같았다. 상담실 문을 열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드는 수남샘은 나를 보고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이었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지 나는 알 것 같았다. 

“걱정마세요. 혼은 꼭 돌아올거예요.” 

“그래. 나도 기다리고 있어.” 

“혼을 도와주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혼이 처음 상담실에 찾아왔을 때를 기억해. 벌판을 헤매는 짐승처럼 너무 외로워 보이는 아이였어. 이곳에서 혼은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거야. 성적도 무섭게 올라갔어. 무엇이든 하고 싶어했어. 자기에게 허락되지 않는, 불가능한 것에 대해 화가 난다고 했던 날 스템프를 보여 달라고 졸라댔어. 나는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 때부터 나와 멀어지기 시작했어. 난 혼의 재능을 이끌어내는 데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그 아이의 심장을 녹이는 데는 실패했어.” 

“……혼은 누구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허락하지 않아요.”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할 수 없으니까.”

“수남샘, 두 개로 갈라진 사람을 고칠 수 있나요?”

수남샘은 고개를 저었다. 

“이전의 나로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어.”     


상담실을 나와 우산을 쓰고 면학관으로 들어선다. 새벽부터 내렸던 비는 여태껏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면학관 자습실에 앉아 영어 교과서를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한 단어도 머릿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밤 12시. 면학관 종료 시간이 되고 나서야 자습실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모두 기숙방으로 걸어간다. 나도 책가방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면학관 창밖으로 수련관 옥상에 사람 형체가 얼핏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수련관 옥상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우산도 없이 면학관을 나와 수련관을 향해 달려갔다. 

“야. 양마리!” 

누군가 날 부르는 것 같았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단번에 수련관 10층을 뛰어 올라간다. 수련관 옥상 문을 힘껏 열어젖힌다. 홀딱 젖은 채 서 있는 혼. 

“혼!”

혼이 뒤를 돌아본다. 얼마나 이곳에 혼자 있었던 걸까. 추운 듯 몸을 떨고 있는 혼. 나는 혼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혼이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넨다. ……스템프였다. 

“어서받아.” 

“…….”

“이것으로 네가 이겼다고 새겨. 그리고 그것을 간직해. 네스티와의 내기에서 네가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줄거야. ……난 빚지고는 못 사는 인간이라.”

나는 스템프를 건네받고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인기척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혼이 내가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5분 후의 혼이었다. 

“그것을 건네준 건 네 인생에서 가장 멍청한 짓이야!”

5분 후의 혼이 나를 노려보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내놔! 네 것이 아니잖아!”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옥상 난간으로 혼이 올라섰다. 

“그만둬! 네가 그것을 뺏는 날엔 너 역시 이곳에서 살아지는 줄 알아! 내가 없어지면 너도 없어지게 될 거니까.”

“미친놈!”

5분 후의 혼이 주먹을 쥐고는 부들부들거렸다. 

“혼아!”

낯익은 목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 이곳에 온 것인지 수남샘이 우산도 없이 서 있었다. 수남샘 옆에 동성이, 유가, 사마귀도 비에 젖은 채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혼을 바라보는 수남샘.  

“무슨 짓이야! 그곳에서 어서 내려와!”

혼은 수남샘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떨며 계속 옥상 난간에 서 있다. ……나는 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언젠가는 혼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말들을 마음속에서 꺼내 올렸다. 

“혼……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1학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어. 네가 주인도 없는 버려진 중복이에게 너의 마지막 남은 간식을 주는 것을 봤었어. 평생 씻지도 않았을 그 냄새나고 더러운 중복이를 마치 보물처럼 쓰다듬는 너를 보고 있었어. ……버려진 중복이를 보며 너는 너 자신을 생각한 거지? 너도 어렸을 적에 그렇게 버려졌을 테니까…… 넌 그날 하루종일 식당에 왔던 적이 없었어. 넌 네가 가진 전부를 다 주는 아이야. 설사 네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혼…… 난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  

혼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고마워. 혼. 근데 나…… 이런 거 없이 한 번 이겨보고 싶어.”  

“…….”

“꼭 이길거야. 그러니까 걱정마.” 

나는 수남샘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스템프를 수남샘에게 건네드렸다.  

“용서해주세요.” 

사마귀와 동성이도 내 옆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혼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혼이 얼굴을 들었을 때 혼의 얼굴에서 뭔가가 흘러내린 것 같았지만 빗물인 것 같기도 했다. 5분 후의 혼이 모든 것이 망하게 되었다며 소리를 지르며 징징거렸다. 혼이, 5분 후의 혼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5분 후의 혼은 혼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5분 후의 혼이, 혼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그리고 그 둘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미소를 띄며 혼이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내리던 비가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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