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영 Sep 17. 2024

쓰레기가 말해줬어

‘뜨겁게 달아오르는 치악고 축제 하이라이트 신 현대판 로미호와 줄리엘! 인생 최고의 연극이 될 무대! 현재 각본가 미공개로 연극 내용과 결말에 대한 궁금증이 나날이 폭주 중!’

신문방송부 제파트가 발행하는 전자신문에 드디어 축제와 관련된 기사들이 쏟아져나온다. 조회수 오백 회가 넘어가는 글은 바로 신 현대판 로미호와 줄리엘 연극의 각본가에 관한 것이었다.       


미호와 리엘은 반세기 동안 치악고에서 리메이크되어 전혀져오는 연극 무대로 미호와 리엘의 각본을 쓴다는 것은 그해 치악고에서 문장력에 있어 최고였다는 뜻이다. 각본가는 연극부나 문예부에서 추첨을 통해 정해지는데 작년 각본가는 문예부 안선배였다. 작년 미호와 리엘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암에 걸려 죽어가는 리엘과 리엘을 수발하는 미호. 사랑하는 사람의 똥오줌도 받아주는 미호였지만 결국 미호는 리엘을 떠나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더럽고 추한 모습까지 받아줄 수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가장 더럽고 추한 모습을 상대방에게 보일 수 있는지, 상대방이 아름답다고 느낄 땐 추앙하면서 그렇지 않을 때 힘들어하는, 사랑의 한계를 생각하게 되는 연극이라고 호평을 받았다. 리엘은 죽어가는 것보다 머리카락을 잃고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에 더 괴로워했다. 리엘이, 떠난 미호를 기다리며 미호가 과거 자신에게 했던 말을 읊는 것으로 연극은 막을 내린다. 당신의 꽃이 모두 졌을 그때 당신을 더 사랑하겠습니다…… 늙고 병들고 기저귀를 찬 여주인공의 모습이 우리들에게는 꽤 큰 충격이었다. ……올해 미호와 리엘의 각본가가 누가 되었는지 간에 작년 미호와 리엘의 평을 뛰어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드디어 올라왔군.” 

사마귀가 폰을 보며 중얼거린다. 각본가에 대한 글 밑에 조회수 천 회가 넘어가고 있는 글이 있었다. 제목은, 안 보면 후회할 걸? 미호와 리엘 주인공 후보자 전격 공개 지금 바로 클릭. 미호와 리엘의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될 최종 후보자들이 드디어 결정된 것이다. 

치악고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인기투표를 통해 미호와 리엘의 주인공 후보가 최종 세 커플로 줄여졌다. 미호와 리엘은 치악고 학생들의 낙점을 받은 치악고 선생님이 직접 연기하는데 각본가뿐만 아니라 미호와 리엘의 주인공이 누가 되는가도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다.      


“후보 1위. 유가락, 서수남.” 

유가락샘은 음악 교사로 십 년 넘게 미호 역을 지키고 있는 40대 초반, 두 딸의 아버지, 핸섬하고 매너가 철철 몸에 흘러넘치는 모든 것이 완벽한 꽃중년이다. 수남샘의 이름을 듣고 나는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포도봉봉을 뿜을 뻔했다. 

“뭐? 수남샘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사마귀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수남샘이 자가 추천하셨어.” 

유가는 그럴 줄 알았다며 당연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몰랐니? 그분 원래 내성적 관종 스타일.”


“후보 2위. 손진도. 서율리아.”

진도샘은 50분 수업 시간 동안 분필 열 다섯 개를 부러뜨리며 교실 온도를 이백도로 끌어올리는 진도빼기에 진심인 20대 후반의 열정 교사다. 진도샘의 사회 수업은 누구도 졸지 않으며 학생들에게 제일 듣고 싶은 수업 1위로 뽑힌다. 미호 역할을 노리는 가락샘의 유일한 라이벌! 


“후보 3위 송말룡, 서율리아.” 

가락샘 대신 말룡샘이 미호역에 낙점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에 말룡샘과 율리아샘 두 분의 이름이 후보에 올라온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생긴 것과 같았다. ……유가, 사마귀, 동성, 나 모두 말룡샘과 율리아샘이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소설이나 영화를 봐도 서로 연기를 하며 사랑에 빠지는 일은 너무 흔한 일이므로 ……분명 이것이 우리에겐 마지막 기회가 될 듯했다.      


“……누구지?”

아까부터 우리 주위에 누군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사마귀도 그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우리에게 눈짓을 보낸다.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였다. 사마귀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제파트.” 

“왜 감시하는 거야?”

“우리가 뭔가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3위에 이 두 분이 올라온 것만 봐도 기적인데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우리밖에는 없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 제파트 비밀요원이 반에서 두 세 명이 된다고 하던데 각오해 너희들…… 이제부턴 모든 게 감시되고 있다는 얘기니까.” 

“어이가 없네.” 

“양마리, 조용히 좀 얘기해.” 

“왜? 이대로 감시당하고 있을 거야?”

“그럼? 어쩌려고?”

나는 홱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애 한 명이 뒤로 돌아서서 빠르게 앞으로 뛰어간다. 나도 그를 쫓아 있는 힘껏 달린다. 학교 본관 계단을 전력질주하는 그. 종아리가 욱신거렸지만 나도 멈추지 않았다. 학교 옥상에서 그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가 어디로 갔을지 예상이 되었다. 나는 학교 본관 옥상에서 한 층 더 올라간다. 드디어 눈에 보이는 새의 둥지 모양을 한 제파트 기지.      


기지 안으로 들어섰을 때 보이는 것은 빽빽이 들어찬 모니터였다. 학생들의 얼굴이 모니터에 수없이 스쳐 지나갔다. 그중에 사마귀, 유가, 동성이도 보였다. 어디선가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스피커로 자신을 제파트 회장이라고 소개한 그녀. 나는 얼굴도 없는 상대를 향해 입을 열어야 했다. 

“나와요. 얼굴을 보이라고요.” 

“미안한데 여긴 내 구역이라서 말야. 출입증도 없이 들어오다니 네가 정말 겁을 상실했구나. 이곳에 네가 무단침입했다는 것을 학생부에 보고할 거니 알아둬.” 

“우리를 감시했잖아요.”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 우리는 합법적으로 조사할 권한이 있다고. 치악고가 이상해져 가고 있다는 제보가 넘쳐나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겠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건가요?”

“아니.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야. 너희는 어떤 힘도 없어. 너희가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어. 너희 때문이라고 할 수 없지만 분명 치악고 학생들의 상태가 조금씩 이상해져가고 있는 건 사실이거든.”

“이상한…… 그게 저는 왠지 좋게 들리네요.” 

“그러니. 나도 그래.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우리의 역할이 그런 거니까. 그게 뭐가 되었든 개인 한 명 한 명이 깨어나는 건 우리에겐 위협이라…… 우리도 살아야 하지 않겠어? 가만히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거야.”

“…….”

“아. 그리고 미호와 리엘의 주인공은 1번이 될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 이미 정해져 있다는 얘기야. 괜히 애쓰지 말라고.” 

그녀는 모든 것을 쥐고 있는 왕처럼 말했다.  

“그건 아직 모르는 거죠. 세상엔 이상한 일들이 많잖아요.” 

어지러웠다. 학교에서 가장 높은 곳.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곳에 있었지만 숨 쉬기가 힘들 정도로 불편하고 답답할 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돌아서서 기지문을 열고 나왔다. 


7교시 영어 수업시간 내내 제파트 회장의 말이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제파트 기지를 나오며 그녀에게 결과는 아직 모르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말 결과가 바뀔지는 자신이 없었다. 종료종이 울린다. 수업은 거의 듣지도 못한 채 그렇게 시간을 버리고 만다. 아이들이 교실을 빠져나간다. 의자에서 일어나 책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가려는데 반장 신마리가 나를 부른다.  

“야. 양마리.” 

“어?”

“너 오늘 당번인 거 몰라?”     


나는 책가방을 다시 내려놓고 책상 줄을 모두 가지런히 맞춘 후 걸레를 들고 화장실로 간다. 

걸레를 빨고 나오는데 낯익은 누군가가 내게 다가온다. 

“선배…….”

나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저 모르시겠어요?”

“아. 생각났어. 평치안.” 

“저…… 소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잘됐네.” 

“동성 선배랑 사마귀 선배 보면서 결심했어요. 되든 안 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해보려고 해요. 저 자신에게 후회 없도록. 그리고…… 있잖아요.” 

“어.” 

“선배도…….”

“…….”

“힘내셨으면 좋겠어요.”      


평치안과 헤어진 후 교실로 돌아와 걸레로 교탁과 창문 이곳저곳을 닦아낸다. 게시판에 흐트러진 종이를 가지런히 하고 열린 사물함 문을 닫고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휴지통에 담는다. 교실 정리를 끝낸 후 휴지통 안에 든 쓰레기를 모두 비닐에 담는다.

하루 동안 쏟아져나온 쓰레기가 이렇게나 많은 것에 놀라워하며 나는 비닐을 들고 본관을 나와 소각장 쪽으로 걸어간다.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선배.” 

뽀피였다. 뽀피의 손에 대걸레가 들려 있었다.

“반갑네. 어디가?”

“체육관 청소라서요.” 

“아. 그래?”

“저 사실…….”

“…….”

“선배 그게요…….”

“혹시 너도…… 소생하기로 했니?”

“어떻게 아셨어요?” 

“아까 평치안을 만났거든.” 

“저 나중에…… 정말 기적적으로 저희 동아리가 살아나면…… 그 때 꼭 인터뷰 좀 부탁드려요.” 

“무슨?”

“첫 모임 때 프리젠테이션 내용을 동성, 사마귀, 유가, 마리 선배 이야기로 채우고 싶어서요.”

“왜? 주제가 뭔대?”

“계란으로 바위 치기요.”

“아…….” 

“해 주실 거죠?”

“응. 남아도는 게 시간이라.”

“저…… 선배.” 

“응?”

“저 사실 3번 클릭했어요.” 

“아…….” 

“꼭 불가능이 없다는 걸 알게 해주세요. 선배…… 제발 꼭 이겨주십쇼.”       


그들은 내가 이기는 것이 마치 자신들이 이기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치악고에서 학생들이 이상해져가고 있다는 말은 어쩌면 그들 자신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꼭 이기고 싶다…… 그런 생각이 강해질수록 뭔지모를 두려움도 커지는 것 같다.      


뽀피와 헤어진 후 다시 비닐을 들고 소각장으로 걸어갔다. 소각장 근처에 이르렀을 때 유가가 보였다. 유가도 오늘 당번인가 보았다. 유가는 나를 보지 못하고 소각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비닐을 소각장 안에 밀어넣고 유가를 기다렸다. 오 분이 지나도 십 분이 지나도 유가는 소각장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소각장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소각장은 훨씬 넓었다. 축구장 크기 만한 곳에 전교실에서 버려진 온갖 쓰레기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안으로 더 깊이 걸어들어갔다. 교과서, 신발, 면봉, 영어사전, 전자사전, 칫솔, 볼펜, 만화책, 책가방, 체육복, 신발, 안경통, 목도리, 양말, 화장품, 잡지, 모자, 폰 배터리, 텀블러, 색연필, 인형, 생일카드, 와이셔츠, 소설책, 베게, 썬크림, 수첩, 티슈, 자, 포스트잇…… 쓰레기들은 교실별로 나눠지고 종류별로 분류되어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 정리된 것이 분명했다. 2학년 2반…… 내가 버린 쓰레기들이었다. 책, 쪽지, 노트, 문제집, 달력, 다이어리, 잡지 모두 그대로였다. 아직 태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내가 버린 종이조각들도 보였다. 


‘안선배이나쁘노무자식가트니라고……너그러케살지마……살지마라고…….’ 

아무 생각 없이 써내려갔던 낙서들이 그대로 종이조각에 남아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종이를 찢어버리려고 했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난 것이라 마음대로 찢어지지도 않았다. 내가 버린 진실들이 이곳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혼자 물에 빠진 듯 바둥바둥거렸는데 얼핏 누군가 눈에 들어왔다. 유가의 뒷모습이었다. 터벅터벅 유가에게로 걸어갔다. 종이로 만들어진 책상에 앉아 유가는 뭔가를 쓰고 있었다. 인기척 소리에 뒤돌아보는 유가. 무표정한 얼굴로 유가가 입을 연다. 

“밟지 마. 밑에. 내게는 소중한 거라.” 

내 발에 깔린 쓰레기들. 나는 얼른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미안. 근데 혹시…… 봤니?”

“뭐?”

“내가 버린 거.” 

“응.”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마. 동성이 사마귀 쓰레기도 봤거든.”

“…….”

“궁금하니? 동성이. 사마귀에 대해 진실을 말해줄까?”

겁나는 표정의 유가.  

“싫어.” 

나는 귀를 막았다. 나에 대한 진실도 다른 이에 대한 진실도 나는 듣고 싶지 않았다. 유가는 그런 나를 보며 재밌다는 표정으로 메마르게 웃었다. 

“두 번 다시 이곳에 올 수 없을거야.” 

“…….”

“너뿐만이 아니야. 그 누구든 사람은 진실을 보는 걸 두려워하니까.” 

유가의 책상에 놓인 주간 이말년. 역시나 주간 이말년의 발행인, 편집인, 기자는 모두 유가였다. 주간 이말년 집필을 유가는 이곳에서 하고 있던 것이다. 

“사람들은 주간 이말년이 무슨 대단한 예견을 하는 줄 아는데 천만해.” 

“…….”

“쓰레기를 뒤지면 앞날은 그냥 나오게 되어 있는 걸 사람들은 모르지…… 좋은 소식도 있어. 아마 최종 커플은 말룡샘, 율리아샘이 될 거야.” 

“어떻게 알아?”

“쓰레기가 말해줬어.” 

정면에 보이는 벽에 쓰레기들이 더덕더덕 붙어있었다. 전교실에서 나온 쓰레기들의 조각 조각을 모아 짜깁기를 해놓은 것 같았다. 그 쓰레기들에서 나온 모든 단어와 낙서, 그림에 가까운 문자들은 거의 다 사마귀, 동성, 유가, 나에 관한 것들이었다. 왕따, 카메라, 중복이, 수집가, 상담실, 용기, 말룡샘, 기술, 꿈, 가나슈, 유튜브, 문예부, 수리꽃나무, 카라멜마끼아또, 우체국, 수련관, 섬, 새벽, 네스티, 검은색, 컵라면, 전따, 내기, 운동장, 수남샘, 압수, 참기름, 등나무, 사물함, 우표, 3학년, 대결, 복도, 창문, 사랑, 체육관, 동아리, 면학관, 모험, 안선배, 튀김만두, 올빼미, 전철, 아이, 생명, 우리도 할 수 있을까, 2호선, 응원, 아름다움, 영원…….  

“거대한 암호 같아.” 

“맞아. 모든 쓰레기에 저장된 문자들 속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묶고 사실에 가까운 것들을 골라서 검증한 후 나는 쓰고 있는 거라고.”  

쓰레기들에 숨어 있는 진실을 그렇게 유가는 풀어내고 있었다. 

“이젠 가줄래? 작업중이라.” 

“미안.” 

“양마리.” 

“어?”

“……뭔가가 일어나고 있어.” 

“어디?”

“치악고에. 근데 그게 뭔지는 나도 아직은 모르겠어.” 

“…….”     


다음날 미호와 리엘 연극 주인공의 인터넷 투표 결과가 온라인 게시판에 올라왔다. ……유가의 말대로였다. 올해 미호와 리엘의 주인공은 말룡샘과 율리아샘으로 결정되었다. 복도를 지나다닐 때마다 편의점을 갈 때마다 등나무 벤치에 앉아 쉴 때마다 아이들이 우리를 보며 수군거렸다. 

그리고 나는 편의점에서 다시 안선배를 보게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안선배가 내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미호와 리엘의 각본을 네가 좀 써줘야겠다.”

오랜만에 정면에서 보는 안선배의 얼굴. 역시나 무뚝뚝한 선배의 표정. 그러나 나는 선배의 얼굴을 얼마 보지도 못한다.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선배가 교실로 돌아간 후 주변 아이들이 내게 몰려든다.  

“축하해요 선배. 뻔한 결말은 진짜 극혐인 거 아시죠?”

“너무 눈물 빼는 감성연극이면 절대 안 볼거니까 알아서 해.” 

“당연히 안선배는 뛰어넘으실 거죠? 기대할게요.”  

편의점 안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매우 거슬렸던 모양이다. 

“쉬는 시간 끝났는데 다들 안 들어갈래?”

편의점 출입문 앞에서 네스티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벌써 네가 이겼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지? 지금부터 호들갑이면 나중에 어쩌려고.” 

“안 그래도 아껴두는 중이야. 네 말대로 축제 때 제대로 즐겨야지.” 

네스티가 나를 노려보더니 편의점 문을 열고 나가버린다.      


인터넷 투표 결과가 온라인 게시판에 올라온 이후 연극 주인공에 대한 불만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학생부와 선도부는 축제 때문에 오히려 학생들 간 분열이 조장될 것 같다는 이유로 가급적 연극에 대해서는 학생들 사이에서 언급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는 공문을 전교실에 붙이고 다녔다.  

사마귀, 동성, 유가, 나는 복도에서도 편의점에서도 면학관에서도 주변 눈치를 보느라 연극에 대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후보 3번을 찍은 이름모를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런 분위기로 인해 말리아, 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말라아는 말룡샘과 율리아샘의 합성어이며 두 분의 사랑을 응원하는 집단으로 양말을 뒤집어 신고 다니는 것으로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다녔다. 

“사마귀 저기 봐봐, 저 애도 말리아야.” 

복도를 지나다니는 말리아들을 보면서 나는 좀 흥분했는데 그것을 보면서 사마귀가 걱정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양마리.” 

“응?”

“따라와봐.”  

사마귀가 나를 소각장 쪽으로 데려간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던 곳. 가는 내내 마음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소각장 정문 앞에 서 있는 유가와 네스티가 보였다. 저렇게 오래도록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서로 뭔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방심하지 말라고. 적은 원래 내부에 있는 거야.”  

“……유가는 우리랑 왜 같이 있는 걸까?”

“가십꺼리가 되니까.” 

“내기에서 이기고 싶은 게 아니고?”

“너는 이기고 싶겠지. 유가는 그런 거랑 전혀 상관없어.” 

“…….”

“유가는 1학년 때부터 이용만 당했어.” 

“……뉴스페이스에게?”

“아니.”

“그럼?”

“뉴스페이스 그리고 우리에게.”

“우리?”

“생각해봐. 우리도 뜨거운 거에만 관심이 있지 않아? 언제는 끓는 주전자처럼 열광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버리지. 언제든 버려버리는 일회용 욕구를 유가는 채워준 것밖엔 없어. 우리나 뉴스페이스나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거라고. 유가 같은 사람을 만들어낸 건 바로 우리야.”

“…….”     


사마귀와 나는 돌아서서 다시 교실로 돌아온다. 2학년 2반 텅 빈 교실에 아무도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 뒷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스크를 쓴 후배는 자신을 도서부 부원이라 소개하며 내게 쪽지를 건넸다.  

“선배…… 선배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게 있어요.”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후배는 뒤집어진 양말을 신고 있었다. 내가 쪽지를 건네받자마자 후배는 인사도 없이 돌아서서 가버린다. 나는 꾸깃꾸깃한 쪽지를 펼쳐 읽는다.      

‘리엘이 받고 싶은 프로포즈에 관한 신뢰성 있는 정보. 언록트2008, 숲에서 길을 잃은 눈먼 여인 그리고 네오에 관한 이야기, 221페이지, 그녀에게 네오의 노래를 들려주세요.’       

이전 07화 혼과 5분 후의 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