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오동이라 했다

"밖에 누구요?"

by 서로봄

어릴 적 해질 무렵이면 나는 단층 주택 옥상에 올라 너를 바라보았다. 뒷담벼락 너머 언덕 위에서 굵은 가지 한 자락을 우리 집 쪽으로 길게 내민 너는,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 서 있던 너를, 그때는 이름 따윈 몰라도 좋았다. 그저 우리 집을 감싸 안은 듯한, 푸근하고 굳건함이 좋았다.


아버지는 건축업을 하셨다. 해운대 외곽의 낯선 동네에 골목을 사이에 두고 닮은 꼴 주택들을 지어 새 주인을 기다렸다. 하지만 집들은 좀처럼 팔리지 않았다. 첫 사업이 실패로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자본도, 시간도 넉넉하지 않았다. 빚을 끌어와 지은 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자 아버지의 걱정은 날로 깊어졌다.


빈집보다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 잘 팔린다는 말에 부모님과 미취학 동생들은 그곳으로 옮겨 갔다. 나는 한 시간쯤 떨어진 본가에서 조부모님과 지냈다. 주말마다 부모님 댁을 갔다 돌아올 때면, 뒤를 돌아보며 아쉬움을 삼키곤 했다. 대문 앞에서 나를 배웅하던 엄마 뒤로, 너의 굳건한 둥치가 서 있었다. 무엇보다 몽글몽글 피어 있던 연보랏빛 꽃송이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어느 날 저녁, 과묵하기 이를 데 없던 아버지가 술기운에 입을 여셨다.

“며칠 전 영도를 갔었지… 집이 안 팔려 고민하던 차에, 지인이 하나 알려주더라. 맹인의 지팡이를 훔쳐와 팔 집에 가져다 놓으면, 집이 팔린다고.”


황당한 미신이라 아버지는 웃어넘겼지만, 시간이 지나자 절박한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고 했다.


전쟁 직후 영도다리 주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맹인들이 모여 살았고, 점을 봐주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영도의 남루하고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대문도 없는 길가의 집 앞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 한 켤레, 그것을 지키듯 곁에 세워져 있던 손때 묻은 지팡이 하나.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레 손을 뻗으려는 순간, 안에서 나이 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 누구요?”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 했지?’

아버지는 결국 빈손으로 돌아섰다.


집들은 끝내 팔리지 않았고, 빚쟁이들의 가압류를 거쳐 경매로 넘어갔다. 부모님과 동생들은 다시 본가로 돌아왔지만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워졌다.

그 뒤로 너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이름조차 알지 못한 채, 나는 오랜 세월 너를 잊고 살아갔다.


수십 년이 흐른 뒤, 전라도 장성의 편백숲에서 우연히 너를 만났다. 인적이 끊긴 숲에서 나무들은 제멋대로 자라 밀림을 이루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하늘을 찌를 듯 곧게 솟은 너를, 몽글한 보랏빛 꽃을 보고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너의 이름이 오동이라는 것을.


너를 올려다보는 순간, 까맣게 잊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담담히 이야기를 꺼내던 표정 뒤에서, 마음은 얼마나 타들어 갔을까. 어린 자식들에게 장난스레 웃음을 머금고 들려주셨던 그 이야기가, 이제는 아련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만약 그때 아버지가 지팡이를 가져왔다면 어땠을까.


이제는 먼 길을 떠나 곁에 계시지 않지만, 문득 아버지가 너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숱한 비바람에 어떻게 뿌리를 내렸는지, 혹은 얼마나 지독히 버텨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래전 언덕 위에서 꿋꿋이 서서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던 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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