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애는 존재했다. 그러나 존재로 기억되지 않았다.
그애와의 시작은 인식이 아닌 스밈이었고, 그애의 실체는 GS라는 이름이 아닌 느낌의 밀도로만 남았다.
짐노페디를 듣노라면, 나는 정체를 상실한 하나의 연약한 감각이 되어버린다. 시간이라는 강의 얕은 수면 위를 한없이 떠도는 작은 이파리처럼.
물리적 공간의 구속을 받지 않는,
그러나 끝내 바닥에 닿지도 못하는
부유하는 의식 같은 것처럼 말이다.
그애는 늘 걷고 있었다. 그러나 목적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애의 걸음은 ‘도착’의 지향이 아닌 ‘존재의 흔들림’이었다. 그 마른 실루엣은 생의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 놓인 하나의 사유적 상태로 서성거렸다. 자폐된 섬에 홀로 갇혀 뿌리조차 내리지 못한 한 그루 미류나무 같았다.
그애와 나의 세계는 결코 동화되지 않았고, 다만 음과 음 사이의 간격, 즉 음악의 여백 안에서 손톱 끝 만큼의 교집합을 만들었었다. 같은 곡을 달리 해석하는 ‘다름’의 영역에서, 우리는
말이 아닌 공명으로 대화했다. 그애는 오직 피아노를 연주할 때에만 내곁에 ‘존재’했다.
그애의 삶은 음악이라는 일시적 몰입으로만 응집된 자아를 유지할 수 있던 지독한 허약함이었다.
어느 해 봄날이었다. 이미 목련 꽃잎은 누렇게 시들고 있었다. 드뷔시의 악보를 들고 멀리서 걸어오던 그애는 빛의 굴절로 잠깐 나타난 존재의 반짝임 같았다. 찰나에 모든 빛을 발산하고야 마는.
그러나 모든 빛은 그림자를 예고함을 간과했다. 그애는 곧, 어둠 속으로 사라져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채색의 정물화 같은 짐노페디를 들으면, 나는 침묵의 ‘부재’에 함몰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결코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 안으로 되말아 들어가는 슬픔마냥.
어느날, 그애가 나를 불렀다.
그러나 그 때도 그애는 나를 보지 않았다. 빛은 창을 비집고 들어왔지만,
그애의 시선은 현실을 벗어난 비물질적 존재의 틈새에 머물러 있었다.
그애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허공’에게 말을 건넸고, 그애의 언어는 사라지고 점차 시선으로 변이되었다. 그러나 나는 보지 못했고,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진짜로 ‘거기’ 있었는지도 이제는 확신할 수 없다.
짐노페디를 들으면, 나는 얇게 쓴 우울 한조각을 베어 무는 듯, 스치는 고통을 맛본다. 한낮의 오수속에 빠져든 듯 그것은 잔잔한 공기를 헤치며 떠다니는 먼지 같다.
한 점의 먼지처럼 그애가 사라졌다. 그러나 아무도 그애의 사라짐을 사건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애의 부서진 정신은 그애가 허리춤에서 빠트리고 다니던 셔츠자락처럼 늘어지더니 곧 흩어졌다.
그애가 끌어안고 다니던 하얀 조각보. 그안에는 어쩌면 존재의 흔적, 혹은 그애가 끝내 전하지 못한 상징의 언어가 담겨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왜, 나는 묻지 않았는가. 그애의 조각보에 감춰진 의식의 편린들을. 그것이 무엇을 감싸고 있었는지,
혹은 누구도 감쌀 수 없었던 고통이었는지를.
짐노페디의 지루한 멜로디 위를 걷다보면 ,
나의 우수는 눈이 내리는 외딴 마을 끝집으로 간다. 그곳에서 나는 바라보는 자의 시선이 아니라,
내려다보는 자의 불안한 시선이 되어 사물을 본다.
결국 그애의 부재는 죽음이 아니었다. 의미의 붕괴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심하게 ‘다음날’로 가버렸다.
그애가 떠난 것은 단지 세상이
그애를 받아들일 여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그애가 껴안고 있던 무게를 나눌수 없어서였을까. 어찌되었던 무게 그 자체가 되어 사라지지 않았기를 바라본다.
그럼에도 그애의 고요는 평화가 아닌,
끝끝내 해소되지 못한 존재의 주름처럼 남아 졌다.
짐노페디를 들으면,
연주 지시가 아닌 이 빠르기말 사이로
한때 그애와 함께 서 있던 공간이 꿈결인 양 스쳐지난다.
느리고 고통스럽게—
추신: 가버린 친구 gs를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