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돌아가는 길
비가 슬픔을 머금고 내렸다. 나는 창가에 앉아 빗줄기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창을 빠르게 미끄러져 지나가는 비의 탱고를.
그러던 어느 순간, 오랫동안 잊었다고 믿었던 이름 하나가 젖은 꽃잎처럼 내 마음으로 툭 떨어졌다.
그 이름은 감춰둔 기억 속에 매달려 있었고, 푸른 녹이 슬어가던 감정의 한 조각처럼 바스라질 듯 위태로웠다.
그날 따라 비는 이상하게 규칙을 잃고 흩어졌다. 마치 세월 속에 묻어두었던 그 이름을 다시 불러들이려 하는 듯, 창문을 두드리는 북소리처럼 집요하게 내 마음을 흔들어댔다.
잉크 냄새가 다 빠져버린 신문 더미 위로 습기가 내려앉았다. 눅진한 공기 속에서 크고 작은 활자들이 어설픈 자세로 일어났다. 거친 보푸라기가 엉키듯 서로 얽혀 드는 그것들 틈을 나는 조심스레 헤집었다. 그러나 감정의 파도가 내 안에서 다시 솟구칠까 두려워 숨을 삼켰다.
상실감은 단순한 허무가 아니었다. 나는 오래전의 상처를 외면하며 그 시절의 시간까지 덮어두려 했다. 그러나 그날의 상흔은 작은 파동으로 일더니, 이내 내 심연을 파고들었다. 작은 물결이 곧 감당하기 어려운 파고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해일처럼 기억의 저수지를 뒤엎어 버렸다.
그 속에서 우리가 놓쳐버린 말들, 서툴렀던 순간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때 우리는 왜 서로의 손을 놓아야 했을까. 왜 등을 돌려야만 했을까. 묻고 싶었으나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질문들은 오랫동안 외면했던 감정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다시 들추어 냈다.
많은 시간이 지나 너는 어느 순간부터 내 삶에서 희미한 그림자처럼 서서히 지워졌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여러 번의 차단과 삭제 속에서 너를 덜어내려 했고, 그렇게 지워진 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너는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리던 기억의 조각처럼, 아주 작은 소문 한 자락도 허락하지 않던 너는 여전히 내 빈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지워진 자리이기에, 어쩌면 더 선명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너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 역시 비가 내렸다. 이별을 고하던 네가 버스 창 너머에서 울고 있었다. 나는 그 투명한 유리창 너머의 너를 끝내 바라보지 못했다. 창을 타고 흐르는 빗물 때문이라며 스스로를 속였다. 뿌옇게 번져가는 유리창의 불투명함에 괜히 화를 냈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함께 울었어야 했다.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워 먼저 무너졌던 너를 혼자 남겨두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너는 멀어지고 있었다. 아니다, 버스 속의 내가 멀어지고 있었다. 너의 울음은 빗소리에 묻혀 사라지고 있었다.
결국 나는, 깜빡이는 검색창 커서와 밤 두 시의 푸른 화면을 마주하고,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바다 속에서 다시 너를 찾으려 했다. 키워드 하나, 사진 하나, 문장 하나에 너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더듬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헤매던 중 마침내 너의 방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문장들이 너를 고치처럼 감싸고 있었다. 숱한 이들의 밤을 견디게 했을 문장들, 너의 시간을 지탱했을 기록들. 나는 오랫동안 알지 못했던 너를, 아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너 역시 슬픔을 머금고 내리는 비 속을 묵묵히 지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서로를 놓친 자리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조용히 버티고 있었다는 것을.
그 깨달음은 내 상처의 모양을 바꾸어 놓았다. 상처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형태를 달리하여 마음 한켠에 자리 잡는 것이었다.
잊는다는 것은 흔적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남아 있는 온기를 차곡차곡 접어 나에게 되돌려 보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이해했다.
비는 여전히 슬픔을 머금고 내린다. 그러나 이제 그 빗물은 나를 적시지 않는다. 오랫동안 굳어 있던 마음의 앙금을 조금씩 풀어낼 뿐이다. 그 물기 속에서 오래전에 잃어버린 나의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슬픔을 마주한 자리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았다. 그것은 새로운 나에게로 이어지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 빛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내딛는다.
슬픔을 건너는 일은 도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잊은 나에게로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슬픔을 머금고 내리는 빗줄기의 입술을 억지로 벌리려 하지 않는다. 그 부드러운 입술을 그대로 맞아들이며 오늘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