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같이 들어주시던 마음
사랑, 그 달콤 쌉쌀함을 기억한다.
오월의 햇살이 살짝 내려앉고, 간간히 바람이 얼굴을 스치던 날,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첫 만남이 계속 이어질지를 결정짓는 건 언제나 외면이었다. 감추어진 마음은 처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한 번도 거절 당해 본 적 없는 듯한 해맑은 얼굴이었다.
어느 날 그가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그 이야기가 내 마음 깊숙이 들어왔다.
젓갈을 팔아 생계와 부를 축적했던 그의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하루하루를 버텼다. 매일 아침 함석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 동네를 누비며 장사를 하셨다. 그날도 이른 아침, 낯선 골목에서 목청껏 “젓갈 사려!”를 외치는데, 저고리 앞섶을 여몄던 브로치가 틑어졌다.
당황한 그의 어머니는 양동이를 들고 있던 손을 잠시 놓고 앞섶을 가리려 했지만, 찰나에 균형을 잃은 양동이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반쯤 삭은 멸치젓갈은 갈 곳을 잃은 채 사방으로 흩어지고 골목 공기에는 비릿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날 그의 어머니는 빈 양동이만 들고 돌아오셨다.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늘 사 오시던 꽈배기는 손에 들고 오지 못했다.
그때부터였던가. 내 마음속에도 빈 양동이 하나가 놓였다. 그리고 조용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만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이든, 인연이란 게 꼭 의도한 대로 흐르진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어머니 이야기는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와 헤어진 후, 손바닥이 공중을 가르는 듯 잡을 수 없는 허전함이 따라왔다.
우리 집 옥상에서 빤히 보이던 그의 집 골목. 여름 해 질 녘, 그곳을 바라보자면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그 골목을 서성이고 있었다. 커피잔 속 단단한 얼음이 서서히 녹듯, 심장 한편이 서늘하게 젖어드는 기분이었다. “조금 더 진중했더라면…”
내 어머니는 말없이 나를 지켜보셨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흔들리는 내 마음을 이미 알아채고 계셨다.
옥상 계단에 걸터앉아 멍하니 있을 때, 어머니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렇게 잊히지 않으면 다시 만나보렴.”
들켰다. 감추려 애썼는데도, 어머니에게는 다 보였던 모양이다.
“다시 한번 만나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아.”
늘 자식들의 선택을 존중하셨던 어머니의 말이었기에, 순간 어리둥절했다. 동시에 마음이 조금 헐렁해졌다. 핑계가 생겼다.
그를 다시 만났다.
결론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인연임을 다시 확인했다.
그러자 이번엔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았다. 마음속 그림자가 사라지고, 그의 집 골목을 더 이상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다.
오래지 않아 마을버스에서 한 좌석 건너 앉은 그를 마주쳤지만, 이번에는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숨이 한결 편안해지고 어깨가 가볍게 내려앉았다. 마음속에는 더 이상 붙잡아야 할 그림자가 없었다.
어머니의 말을 듣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의 말이 다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때로는 이렇게 마음을 놓아주기도 했다.
미련을 미련스럽게 붙잡고 있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생각들로 가득 채워져 있던 양동이가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부연 >
어머니는 늘 말수가 적었다.
애써 가르치려 들지도, 대신 결정해 주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계단을 오르내릴 때의 속도나, 방문을 닫는 소리의 무게 같은 걸로도 이미 나의 심중을 알고 계셨다.
그날 옥상에서 멍하니 앉아 있을 때도 그랬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어머니도 묻지 않았다. 다만 “잊히지 않으면 다시 만나보렴”이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셨다. 그 말은 방향이 아니라 여백에 가까웠다. 선택하라는 압박도, 붙잡으라는 부추김도 아닌, 마음이 숨 쉴 수 있는 틈.
지나고 보니 어머니는 늘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넘어질 걸 알면서도 손을 먼저 내밀지 않았고, 돌아올 자리가 있다는 것만 조용히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는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았고, 끝내야 할 인연 앞에서도 스스로를 탓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빈 양동이를 들고 돌아왔던 날을 떠올릴 때면,
나는 자연스럽게 내 어머니를 생각한다.
비워진 것 앞에서 울지 않고, 다시 채워질 시간을 믿는 사람.
무언으로 자식의 마음 무게를 가늠하던 사람으로서의 내 어머니.
어머니는 이미 알고 계셨을 것이다.
다시 만나도 끝은 같을 거라는 걸.
그럼에도 한 번 더 만나 보라고 하신 건, 미련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을 끝까지 확인하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는 걸.
아마도 그때 가벼워진 양동이는 미련이 덜어져서가 아니라,
어머니가 내 마음 한쪽을 대신 들어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