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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삼촌 Dec 24. 2023

생각의 소용돌이(2)

생각의 경계에서.

이번 주는 비와 눈바람, 강추위 속에 택배를 하느라 녹초가 되었다. 오늘은 바람이 유난히 거칠다.  탑칸에 올라가 짐을 정리하는데 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새하얗게 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며 짐을 실은 대차를 끌고 가는데 꿈결을  느낌이다.


불현듯 오래전 군대에서 이등병 때 주말사역병으로 뽑혀 석탄창고를 정리하러 갔던 기억이 떠올다.


석탄창고 한켠으로 몰린 석탄더미를 삽으로 퍼 나르는데 열린 창고 문틈으로 스며든 여러 갈래 빛줄기를 따라 석탄가루가 반짝이며 흩날리는 난생처음 경험하는 광경이었다. 탄광에서 일하는 느낌은 이럴 거라고 생각었다.


오늘 나는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택배를 하는 동안 나의 내면은 이런저런 생각들거칠게 요동치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어떤 노력도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그 상황을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없다.

설사 어쩔 수 없는 희생을 감수할 만큼 마음이 강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노력하면 벗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버텨내게 만든다.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폰 테크>


삶이 주는 시련 같은 상황들은 늘 제멋대로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연약해진 마음을 부정적인 생각이 차지하 한다. 하지만 눈자락을 흩날리며 배송하느라 오가는 가족을 바라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요즘은 아들이 탑차 문짝에 아파트 동별 배송개수 체크표를 만들어 붙여놓았다. 빼먹고 배송 못한 상품이 줄어드니 확실하게 배송시간도 빠르다. 배송하랴 수량체크하랴 열정적인 아들을 보노라면 힘든 상황에 대한 자신감이 되살아난다.


최근에 아들이 화물운송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적성검사를 통과했다. 아들이 운전만 익숙해지면 우리 가족택배에도 새로운 변화가 생기게 될 것 같다. 서로 교대로 일하거나 물량분담이 용이해져 여러모로 택배를 효율적으로 할 것으로 기대된다. 무엇보다 아들 스스로 음악을 하며 홀로서기를 할  하나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생각하니 한결 더 든든다.

택배를 마치고 들어선 집안은 너무나 감사하 포근하다. 집안편안히 내다본 창밖은 새하얀 설국 담은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다. 창문 곁에서 감상하던 아내가 가벼운 탄성을 질렸다. 어린 고라니 한 마리가 눈길을 서성이고 있었다. 아마 먹을 걸 찾아 여기까지 내려온 게 아닐까 하는 추측과 함께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집의 안과 밖, 경계에서 우리의 생각은 달라진다. 창 밖에서는 눈길을 헤매는 고라니와 같은 처지로, 창 안에서는 고라니를 바라보는 입장으로 생각하는 관점이 바뀌었다.


어찌 보면 삶의 경계 안과 밖에서 일관성을 상실한 채 다르게 작동하는 생각의 행태 때문에 우리는 오늘의 힘겨운 상황들을 이리저리 헤치고 나올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싶.


우리의 생각은 삶의 양한 경계 변곡점 삼아 이리저리 변화고 있었다. 




삶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던 시기 문화란 없었다고 한다. 


그것어떤 요사스러운 경계가 그려지면서 시작되었다.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는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관념>이 문화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고 분석다. 달리 말해 인간들 상호 간의 교류 속에 실제로 행해질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결코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의 경계선을 긋는 일에서 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인간다운 독특한 존재로 만들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 삶 속의 경계들은 차이를 창조하기 위해 그려진다고 했다. 장소와 장소, 어린 시절과 성인시절 같은 특정기간 동안의 시간들, 인간 존재와 나머지 인간들 사이에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경계들이 설정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차이들'을 창조하기 위해 개연성이 있는 사건이나 행동을 의도적으로 선택한다. 그는 삶의 경계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고 어디로 언제 움직이는지를 생각하게 고 우리 스스로가 자기 확신을 지닌 채 행동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경계들은 삶을 제약하고 힘겹게 만드는 원흉처럼 여겨졌지만, 그 앞에서 우리는 허용된 행동과 금지된 것들의 차이를 구분하는 지혜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경계의 안과 밖에서 돌변하는 생각들을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레 한쪽에 치우친 편견을 넘어 폭넓게 주변을 수용하는 법을 체득한다.


결국 삶의 다양한 경계들은 우리의 생각 속에 확신을 심어 준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지켜야 할 도리, 앎의 정의를 명확하게 다듬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리의 일상들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불안정하게 흐물거린다. 꿈틀거리고 울퉁불퉁 거리는 대지 위에 두발을 붙이고 안정되게 서있기 조차 힘들다.


오늘날 우리는 인공지능, 로봇, 스마트폰 등 전자문명이 창출하는 가상적인 관계들이 현실적인 관계의 가장 실질적인 부분들대체하는 세상 속에서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불안 속에 살아간다.  


그는 우리가 유토피아의 꿈이 남아있던 '정원사'의 시대를 지나 '사냥꾼'의 시대를 살아간다고 했다.  사냥꾼의 삶이란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는 삶이 아니라 이미 유토피아 안에 들어와 있는 삶이다. 원하든 원치 안 든 간에 사냥꾼들로 내몰린 우리는 사냥꾼이 되느냐(죽이거나), 사냥감이 되느냐(죽거나)하는 살벌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벌한 사냥 같은 일상 속에서는 패배와 배제의 방식만이 유효하게 작동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기에 늘 긴장하고 불안에 떠는 삶이다.


이런 기괴한 유토피아 속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사색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채 살아가

한다는 사실이 더욱더 우리를 비극적으로 만든다. 이러한 상황에 만연하는 가장 위험한 유전자로 레베카 코스타는 모든 것을 돈과 연관 지어 생각하려는 극단적 경제우선주의적 사고라고 지적했다.


얼마 전 인기 있는 애완견 품종을 집중적으로 사육하는 개사육장 실태를 취재한 뉴스를 시청하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면도칼로 배를 가르고 새끼는 취하고 어미는 버리는 인간들이 너무나 잔인하다. 돈에 물든 인간생각 속에는 단 한 톨의 자비와 온정이란 없다.


인간다움을 상실한 유토피아는 결코 행복할 수 없고 살 떨리는 잔인한 피뿌림만이 난무하는 실상은 지옥일 뿐이다.


불확실성으로 소용돌이치는 현실을 헤치며 나가야 할 때마다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 없이 행동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걸까?




삶을 선택하는 일들에는 차근차근 읽고 하나하나 잘 따라 하게 해주는 그 어떤 설명서도 부착되어 있지 않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선량한 사람조차 악하게 만드는 이런 세상 속을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사랑에 빠져 운명에게 인질로 사로잡혀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는 모두 인생의 예술가들이라고 명했다. 자신들이 원해서 선택했다기보다는 보편적인 운명의 법칙에 따라 그러한 인생의 예술가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라 는 의미다.


그의 말대로 삶의 예술가는 유명하든 무명이든, 훌륭한 솜씨를 지녔든 별로 솜씨 없는 사람이든 간에 내 앞에 놓인 일상을 재료 삼아 부지런히 무언가를 새겨야 하는 처지다.


이때 노력들 속에서 사용했던 그 끌들은 바로 그 자신들의 성격이라고 했다. 삶의 예술가들이 과연 어떤 선택들을 하게 될 것 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성격이기 때문이다. 


성격은 바로 운명과 여러 우연적 사건들에서 그것들이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거나 지녀야 한다고 요구하는 그 전능한 힘을 빼앗아 버린다.


체념하는 듯 수용하는 태도와 상황이라는 그 전능한 힘을 거역하겠다는 대담한 결단 사이에 성격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카뮈가 표현한 인생관 속에서 그의 성격을 느낄 수 있다.


"아름다움도 있지만 분명 굴욕적인 것들도 있다. 나는 그 사명이 어떤 어려움을 안겨준다 할지라도 결코 그처럼 굴욕적인 것들이든 아름다움이든 간에 둘 중 그 어느 하나에도 불성실하고 싶지 않다."


까뮈는 "비참한 고통과 태양 사이의 중간쯤 어딘가에" 자신을 애매하게 위치시켰다. 인생을 살면서 수용과 반항을 조합하는 일이야 말로 곧 아름다움에도 관심을 두고 돌보며 그 비참한 것들에도 관심을 두고 돌보는 일이야 말로 바로 양쪽 전선 모두에서 싸우겠다는 치열한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매번 똑같이 반복된 행동을 해야 하는 시지푸스를  꼭 닮은 우리의 운명은 오로지 자신의 노동들이 결국에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거나 깨닫기 때문에 비극적일 뿐이다.

 

나는 눈보라가 흩날리는 탑차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생각을 부여잡고 반항해야 하는 이유를 또 한 가지 발견했다. 그럴 때마다 느끼곤 한다. 태풍의 눈 속에 존재하는 무풍지대의 평온함을, 그리고 삶의 경계 안과 밖이 이처럼 달라질 수 있음을 말이다.


그리곤 시지푸스가 오늘도 거대한 바위를 기꺼이 껴앉고 까마득한 산정상을 향하려는 이유가 살 떨리게 와닿아 그만 가슴이 메여온다.


사람들은 반드시 시지푸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만 한다. 결국 시지푸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정말로 수용하는 그 행위는 반항을 만들어낸다.


만약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적어도 그때 가장 그럴듯한 결과는 바로 반항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지그문트 바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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