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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삼촌 Dec 31. 2023

감정코끼리.

감정의 경계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택배기사에게 가힘겨 화요일을 앞두고 급보를 받았다. 급히 밤 차편으로 머나먼 장지를 향하면서 과연 아버지답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삶의 가장 힘겨운 고비와 문턱에 있을  나를 항상 찾으셨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시며 홀로 남겨질 어머니를 찾으시다가 운명하셨다. 나와 여동생들은 정신없이 장례를 준비해야만 했다. 상주로 장례식장을 지키는   가슴표현할 수 없는 자책과 연민, 그리고 애통함으로 일렁였다.


각기 먹고사느라 한동안 보지 못했던 우리 오누이들은 부모를 잃은 슬픔이 가득한 장례식장에서 고단한 세월이 스란히 내려앉은 모습 보고는 그저 안쓰러운 눈길로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을 뿐이.

화장장에서 솟는 불길 속으로 버지의  사라지는 모습을 모니터로 봐야 했다. 가슴속 깊이 통한 슬픔이  올랐다. 

 

아버지, 고생 많으셨어요. 제는 편안히 세요.


잠시 유골이 정리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제야 주변의 수많은 장례객들이  들어왔다.  우리 곁의 모니터 앞으로 한 무리의 가족들이 몰려왔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오열하는 가족들의 모습에 그만 잠시 진정되었던 내 가슴이 다시 아려오기 시작했다.


건너편에 앉아 무심한 듯 신문을 펼쳐 들었던 머리가 허연 아저씨 한분도 연신 눈물을 훔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은 이렇게 이 가슴 저 가슴들을 옮겨 다니며 후벼 파듯 상흔을 남기며 너른 화장장 대기실의 공간을  감정 속으로 렇게   있었다.




감정이란 서로 다른 생각과 취향, 성격을 가진 사람들도 하나로 우르는 강력 힘을 지녔다. 젊은 시절 대학축제 때 무대 위에 선 가수가 부르는 노래에 맞춰 떼창을 부르던 수많은 캠퍼스 청중들 속에서 나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수많은 군중 한 덩어리로 열광하며 한 몸처럼 반응하고 움직이는 광경은 전율, 그 자체였다.


지만 감정적이라는 말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더 다. 감정이란 사리분별 떨어뜨리고 체통스럽지 못하게 만든다고 여기는 우리 사회의 부정적 통념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이란 이성보다는 감정으로 살아가는 다.


리는 감정이라는 촉수로 서로를 더듬고 부대끼며 사회적 존재다. 질투심이라는 감정이 생겨나는 것도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커다란 불균형 때문보다는 오히려 서로 근접상태이기 때문이라고 인성론에서 데이비드 흄 말다. 의 말대로라면 감정이 누군가와 가까이 함께 있다는 확증이 되는 셈이다. 일반병사가 장군에게 질투심을 느끼지 않는다. 뛰어난 작가는 평범한 삼류작가보다 는 자신에게 더 근접한 작가들에게 더 질투를 받는다.


감정이란 리 곁에 누군가라는 존재가 생기는 순간이면 자연 나타그것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이 세상에서 힘들게 노력하고 부산을 떠는 이유는 무엇인가?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목적을 무엇인가?"라며 사람이 사람들 곁에서 바둥거리며 삶의 조건을 개선하며 얻어내려고 애쓰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를 질문다.


알랭 드 보통은 다른 사람들이 주목을 하고 관심을 쏟고 공감 어린 표정으로 사근사근하게 맞장구치면서 알은체를 해주는 것이 우리가 거기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답한다. 사람이 부자가 되려는 이유 끌어모은 부를 통해 자연스레 세상의 관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이 힘겨운 이유는 돈이 없다는 사실보다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박탈감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이토록 다른 사람의 관심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남의 관심 때문에 기운이 나고 무시 때문에 상처를 받으며 사는 우리 인생의 실상을 알고 나면 인생이 참 터무니 없어진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과 판단에 좌우되면서 우리의 삶은 정체성을 상실해 버렸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랑에 표류하는 돛단배와 같은 불안한 감정만이 우리의 가슴을 엄습한다. 알랭 드 보통은 속물근성으로 물든 사회집단 속에서 구성원들은 분노와 좌절감만이 경험하게 된다고 했다.

   

사회적 또는 문화적 편견을 드러내는 모든 사람, 즉 어떤 한 종류의 사람이나 음악이나 와인이 다른 것 보다 분명하게 낫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을 속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알랭 드 보통/불안 >

 

속물처럼 살아가고 속물집단 속에서 생존해야 한다는 의미는 뼛속까지 후벼 파는 편견의 아픔과 무시와 외면이라는 감정적 형벌을 감내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기에 부지런히 자신이 다른 이들과 차이나는 점을 티 내려 애쓰며 산다. 꾸안꾸. 꾸민 듯 안 꾸민 듯 잘난 체하려는 본심을 표현하는 방식조차 차별화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면서 나의 내면 깊숙한 속에 작동 중인 타이머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삼십 년도 채 남지 않았을지도 모를 인생인데 이렇게 속물처럼 살아가는 것이 옳은 걸까라는 회의가 어느 때보다  졌다. 버지의 팔십 인생이 한 줌 재로 변한 유골함을 가슴에 부여  크고 작은 인생사가 한결 더 부질 없어다.


이리저리 얽히며 인생을 살다 보면 생겨나는 질투심, 박탈감, 서운함, 분노, 모멸감으로 우리의 가슴누더기처럼 너덜거리곤 해진다. 감정의 격랑이 일렁이는 삶의 경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차별을 두는 것에는 모멸감을 느끼지만 나 스스로가 타인과 차이를 인정해 버리는 행위는 상처가 아니라 오히려 감정적 보호막이 되어준다. 타인의 삶과 차이를 인정할 때 비로소 나의 삶에 오롯하게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난다. 누구나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자본주의식 사고는 너와 나는 모두 평등하다는 감당 못할 무족쇄가 되어 우리 삶을 옥죄인다.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 속에 불안과 모멸, 질투로 뼈를 삭히는 불멸의 밤을 보내우리의 소중한 감정에너지를 더 이상 소모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속물적인 세상에서 우리의 지위를 지키며 산다는 사실이 어찌 보면 불가능한 일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속에 째깍거리는 인생타이머를 느끼는 순간 내 삶의 가치 있는 것만 집중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함을 깨닫기에 오늘도 나는 나의 거대한 감정코끼리를 내 삶의 영역 속으로 몰고 가려 고심하고 애쓰느라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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