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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삼촌 Feb 11. 2024

010. 감정이 잦아들면 행복도 달빛처럼 스며든다.

도덕감정론 5, 우리가 공감해야 할 대상들.

프로축구선수에게 중요한 게 '실력'일까 아니면 '관심'일까?


출중한 실력이 있어도 감독의 관심에 따라 자신의 축구인생 성패가 좌우된다 현역 프로축구선수의 솔직한 말이 관심을 끈다.  


축구선수가 감독이 추구하는 취향을 맞추지 못해서 눈밖에 나는 순간 벤치만 달구다가 축구인생그대로 끝낼 수밖에 없다. 공을 다루는 기술보다도 축구감독의 관심여부가 성공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비단 축구선수겪어야 하는 냉혹한 현실이 아니다. 


타인의 관심이나 나를 둘러싸고 다사다난하게 벌어지는 세상사를 뭉텅 그려 <세상물정>이라고 한다면 그런 세상물정에 잘 맞추고 살아가것을 사람들은 <처세>라고 칭한다.


처세술이란 어찌 보면 '강요받는 공감'같기도 하 공감을 빙자한 교묘한 '인간조정기술'처럼 여겨진다면 지나치게 염세적인 시각인 까. 


어찌 됐든 자신의 출중한 실력보다는 타인의 관심을 얼마나 느냐따라 인생의 희비결정되는 현실을 오늘 삼아 우리는 살아야한다. 타인의 관심에 대한 갈증은 병적인 집착이  종국에는 사람들 간에 경쟁 되고 만다.


관심을 끌기 위해 경쟁적으로 처세 축구를 하고, 글도 처세적으로 써야 하고, 일터에서는 지런히 처세하듯 일하며 버텨야 한. 문제는 이런 삶은 고달프기만 하고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점이다. 


'자비피로', '공감피로'가 만연해진 사회로 변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우울한 뉴스와 사진에 심리적 탈진상태에 빠져버렸다.


핑크 플로이드가 표현한 것처럼 '우리는 편안하게 무감각해졌다.'


사회전체가 너무 언짢고 위협적이고 비정상적인 정보들에 대해서 억압, 부인, 외면, 재해석하려는 '부인 문화'가 만연다. 힘든 상황에서 경험할 수치심, 죄책감에서 멀어지고 싶은 심리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그럴듯한 변명으로 일관한다. 


<공감하는 능력>의 저자 로먼 크르즈나릭은 이런 부인논리는 공감적 자아를 파괴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고 경고한다. 이런 부인문화와 권위에 저항하고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로 대하는 순간 공감은 사그라든다. 누군가를 인간적으로 대한다는 의미인 '타자'의 인간화에 담고자 한 철학자의 진정한 의도는 뭘까?




사람은 누구나 관심에 목마르다. 

상에 갓 태어난 아기의 첫 일성조차 주변에 관심을 촉구하는 구슬절규다.  관심에 대한 욕구는 원초적 본능이다. 타인이 내게 주는 관심에 따라 우리는 그들이 나를 알아주고 인정한다는 느낌을 받고는 정감을 얻는다.


사람은 견디기 힘든  속에서도 타인의 관심 얻고 싶어 하는 본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서로 함께 같은 감정을 느끼려 주체 못 할 감정을 억제는 행위가 자연스레 나온다. 슬픔도 함께 나누는 순간 충분히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격렬한 슬픔에 빠진 나를 주변사람들이 위로해 줄 때 나는 큰 위안을 받는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내 슬픔에 온전히 공감할 수 있도록 나의 감정을 적절히 억제한다. 그래야 위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 스미스의 말처럼 우리의 감정을 다른 이들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까지 통제할 수는 없다. 리가 가진 인내력과 통제심은 그리 신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조상 손바닥만 한 두엽으로 수만 가지 상황에서 발생하는 감정들을  력을 다해 통제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앨런 숀 Allen shawn의 '진정 출중한 능력이 발현되려면 필요한 에너지를 다른 분야에서 한 곳으로 모아야 한다.'는 말처럼 우리 감정에너지를 한 곳으로 집중시켜 효율적으로 사용할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 삶의 영역에서 마주치는 모든 타인에게인정받으려는 욕심을 포기해야 한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놓인 거대한 감정의 골을 고스란히 남겨두어야 한다. 


진상고객을 만났다. 택배를 하면서 진상고객이란 자신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나름 간단히 정의한다. 결코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권리와 입장만 내세우고 협박도 서슴없다. 그들은 편의점이나 대형마트 계산대에서 형성되는 관계들처럼 감정의 힘을 뺀 채 사무적으로 간단히 대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심리적 거리를 최대한 멀리 둔 채 용건만 최대한 간단히 주고받으며 대응해야 한다.


우리 인생의 최대과제는 이기심을 극복하고 감수성을 밖으로 타인을 향해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동시에 해로운 나르시시스트들을 알아내고 그들의 독한 격에 해를 입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가슴속에 타인을 향해 팽팽하게 격발 하려는 정의 방아쇠에서 그만 손가락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가 편안하고 행복해질 수 있 때문.


리가 가진 감정에너지는 소중한 사람과의 감정골기들을 메우사용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한낱 잠시 스치고 지나치는 인연들에게 하소연하고 인정받으려 애쓰며 소모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 인정받기를 기대해야 하는 대상은 따로 있다. 나는 소중한 아내를, 아들을 잃을 뻔했다. 


이익만 기대하는 인연들에게 모든 감정에너지를 소모하 왜 그리 힘겹게 살아왔을까. 모든 시도들이 좌절되고 멈춰 서니 그제야 소중한 존재들이 보였다. 오히려 멈춰 선 게 감사할 뿐이다.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시 한 편이 아니라 내 가족들이 그것을 좋아해 주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내와 공감하고 아들과 공감하는 즐거움을 한가지씩 찾아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 아닐까 싶다.


즐거움은 지루함과 불안사이의 경계에서, 즉 행동능력과 눈앞의 장애물이 서로 균형이 맞을 때 찾아온다는 이하이 칙센트미하이 말처럼,


행복은 우리가 소중한 이들을 위해 아끼고 모아둔 우리의 감정들이 잔잔한 수면을 이룰 때 달빛처럼 영롱하게 수놓으며 우리곁으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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