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남과 자신을 비교한다. 끊임없이 내가 가진 것과 비교한다. 그런 비교는 항상 시기질투를 불러일으킨다. 물건, 관심, 존경, 뭐가 됐던 내가 원하는 것을 남이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시기심은 생겨난다.
시기심이란 '나는 너보다 더 많이 원하고 더 많이 필요해.'라는 용광로 같은 욕망을 품고 있었다.
시기심은 속이 쓰린 감정이다. 그건 자신의 열등을 인정하는 꼴이고 인간에게 그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
시기심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을 좀먹는 그런 감정을 완화하거나 억누를 핑곗거리를 찾아낸다. 그들은 세상에 좋은 것, 좋은 사람들은 죄다 깎아내린다. 시기할 사람을 말 그대로 평생을 찿아다닌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도 함께 시들어간다.
60대 형님부부가 택배를 그만둔다고 했다. 일보다 마음이 힘들어서 그만둔다고 했다. 부부의 구역은 대부분 단독과 빌라로 이루어진 번지대였다. 배송여건도 힘들지만 고객항의도 많았던 것 같다. 불합리한 고객항의라도 택배기사는 고스란히 견뎌야 하는 경우가 많다. 오랜 시간 설움과 울분이 쌓이던 차에 흔하디 흔한 고객클레임 한건을 계기로 그만두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힘든 코로나 기간에 격리치료받은 후 쌓여있던 많은 짐들을 밤늦도록 배송하고, 무릎에 염증이 생겨 쩔뚝이면서도 배송하던 형님의 모습이 생각났다. 차라리 고객전화와 클레임시비에 시달리지 않아 마음 편하다며 담담하게 말하는 형수의 말이 우리의 마음을 참 불편하게 했다. 요즘은 비워진 택배자리는 금방 채워진다. 다음 주에 새로운 40대 후임자가 출근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렇게 택배기사들의 빈자리는 흔적 없이 들고 나며 채워지고 있었다.
맞은편 대리점에는 젊은 오누이가 택배 하러 새로 들어왔다. 택배가 힘들고 남들 보기에도 좋아 보이지 않는 험한 일인데 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선택했냐는 물음에 요즘 젊은 층들의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는 대답이 되돌아온다. 얼마 안 되는 월급 받으려고 스트레스받아가며 하루종일 사무실에 앉아 일하기보다는 하는 만큼 버는 택배가 더 매력적이라고 여겨져 관심들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선택은 그리 쉽지 않았다고 한다. 택배를 하던 사촌형님이 계셔서 무난하게 적응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젊었지만 이 바닥의 텃세를 이미 알고 있었다.
듣다 보니 텃세로 힘겨웠던 택배초보 시절이 생각났다.
오십 대의 나이에 아는 이도 하나 없이 생짜로 택배 하려는 나는 혹독한 텃세를 겪어야만 했다. 늦은 나이에 택배 하는 나를 배려해서 당시 소장이 아파트 단지들과 약간의 번지대를 첫 구역으로 배정했다. 이후 알 수 없는 미움과 질시에 시달려야 했다. 일 년 가까이 수입도 없이 고생하며 일했던 자신보다 더 나은 혜택을 받는다고 여긴 일부 동료 택배기사들의 텃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툰 택배일과 시기심에 시달리며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도자기공은 도자기공을 시기하고 공예가는 공예가를 시기하고 작가는 작가를 시기한다'라고 BC8세기에 헤시오도스는 말했다.
시기심이 가장 많이 생겨나는 것은 친구나 같은 분야의 동료사이에서였다. 역설적이게도 시기심을 느끼는 사람은 처음부터 친구가 되려는 경우가 많다.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우리 내면 속 시기심은 맹렬하게 꿈틀거린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중에 하나로 기가 막히게 시기심을 잘 해독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시기심을 모면할 줄도 알아야 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그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생기는 일이라고 단순하게, 가볍게 지나칠 아량도 갖추어야 했다.
그래야 소중한 우리 관계와 삶을 아프고 불행하지 않게 지켜내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기심이란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내가 상대보다 열등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뜻도 된다. 그래서 이런 시기심을 느끼자마자 우리는 나 자신에게조차 그것을 숨기려 몸부림
친다. 시샘의 대상이 되는 상대를 불공평, 운, 도덕적 타락으로 몰아가며 나의 이 감정은 시기심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설득하려 애쓴다.
시기심은 가까이하는 사이에만 생겨난다. 시기심은 남의 기쁨에 고스란히 공감 못하는 이유가 된다. 시기심은 행복을 반감시킨다. 내속에 시기심이 사라질 때 온전한 기쁨을 되찾을 수 있다. 행복이 나를 평온히 감싸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이유에서 생기는 비교적 작은 기쁜 일들에는 쉽게 공감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시기심을 벗어나 사소한 것을 보고도 즐거워하는 이런 성향들은 심지어 꽃까지 피어나게 하고 젊고 아름다운 눈들을 반짝거리도록 만든다.
이러한 성향은 같은 동성의 사람들 사이에도 나이 든 사람까지 평상시 이상으로 기쁨을 느끼도록 만든다. 그들은 잠시 동안 자신의 노쇠함을 잊어버리고 그들에겐 오래전에 이미 낮 설어버린 유쾌한 생각과 정서에 자신들을 내맡긴다.
이처럼 많은 행복감을 느낌으로써 유쾌한 생각과 정서가 그들의 마음속에 다시 떠오르게 되면 그들은 마치 오랫동안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시 만나서는 그동안의 오랜 이별 때문에 더욱 진심으로 껴안을 수 있는 친구처럼, 이러한 생각과 정서는 그들의 가슴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
하루는 봄날이었다가 다음날은 겨울처럼 춥고 오전엔 비가 오고 오후엔 습한 눈이 하루종일 내렸다. 봄날같이 따사로운 햇살 뒤에 눈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일하니 택배가 더 힘겹다.
하지만 전화기를 타고 쏟아지는 이기적인 독촉과 요구들이 눈비보다 추위보다 더 힘들다.
조용히 집으로 되돌아온 우리는 아들이 좋아하는 수육을 준비했다. 막걸리 한 병을 와인잔에 나눠마시니 만사가 행복해진다. 그냥 이렇게 이런 템포로 사는 거다.
한걸음 한 걸음씩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승진해 가는 매 단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실제로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에도 지나치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고 그에게 추월당한 사람들로서도 정당하게 어떤 시샘도 품을 수 없으며 그의 뒤에 쳐져 있는 사람들도 어떤 질투심을 느낄 수가 없다.
때론 시기심이 느껴질 때면 시샘의 대상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는 게 좋을 때도 있다. 힘겨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또 다른 연약한 모습을 보는 순간 동정심이 생기며 내 안의 시기의 불꽃이 사그라짐을 느끼게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스미스의 말처럼 우리는 끊임없는 비교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내면 속 자부심을 키우는 게 시기심을 잠재우고 한결 더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아닌가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