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니삼촌 Mar 10. 2024

반품상자 위에 덧붙여진 쪽지 하나.

제로인생 그리고 공감을 하나씩 더해가는 의미.

바쁜 배송 중에 아내와 아들이 반품송장과 수거해 온 반품을 한참을 살펴보며 고민하고 있었다.

결국 뜯어서 내용물을 확인해 보니 우려한 대로 다른 상품이었다. 간신히 통화된 고객은 상품을 못 내어놨다며 내일 내놓겠다고 했다. 수거해서는 안 되는 반품상품이었다.


최근 잘못수거한 반품으로 인해 몇 차례 곤욕을 치러야 했다. 우리는 한층 세심하게 아무런 표시가 안된 반품상자를 살피고 또 살피게 된다.


반품상자는 이런저런 사유로 환영받지 못한 채 문 앞에 다시 되놓여진 측은한 처지다. 하지만 허옇게 맨몸으로 내쳐진 녀석들이라서 그런지 늘 퉁명스럽고 불친절하다. 그 속뜻을 알길 없는 택배기사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바쁜 마음에 지레짐작으로 선택을 결정한다.


우리는 타인에게 나를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 오해를 오해인 채로 내버려 둔 채 오직 눈에 보이는 결과만 치중한 채 살아간다.


나도 아내에게, 소중한 이들에게 내 가슴 밖으로 감정이 담긴 무수한 반품박스들을 상대를 배려한 어떠한 설명도 생략한 채 내놓곤   같다. 오해와 오해로 쌓여진 관계는 서운함, 미움 등 부정적인 가시 같은 감정들을 돋아나게 하고 서로를 아프 만들었다.


아내가 왜 그리 서운해하는지. 아들들이  힘겨워하고 고민하는지 모른 채 무심하게 지나쳤던 지난 순간들의 잘못들이 하나둘씩 회한이 되어 떠오른다.


거부하며 내밀었던 반품상자 위로 조금의 양해를 구하는 쪽지를 덧붙일  조차도 모른 채 살아왔음말이.


호리에 다카후미.

그는 2000년대 일본사회를 뒤흔든 최고의 이슈메이커였다. 첨단벤처기업도 하고 중의원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프로야구단, 후지 tv를 인수하려 시도하는 등 자신이 몸담은 IT업계 외에도 방송, 스포츠, 정치분야로 진출을 꾸준히 모색했다.


하지만 2006년 증권거래법 위반으로 2년 6개월의 실형을 받고 한순간에 촉망받던 기업가에서 부도덕한 범법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는 세상에 만연한 불합리한 것들이 싫고 미웠다. 그래서 시스템을 바꾸면 국가가 변할 거라 믿었다.

그러나 의욕과 이론만 앞세운 소통방식은 오해만 불러일으켰음을 깨달았다.


감옥에 다녀온 후 '호리에 다카후미'는 반성한다.

세상의 공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사람에게 호소하고 이해를 구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출소 후 바뀐 것은 그의 신념과 생각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의식이다.



지금까지 나는 온 힘을 다해 버티며 살아왔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지는 것이라 생각해 많은 적을 만들었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분명 현명하지 못한 태도라는 것을...


나는 체포되었고 모든 것을 잃었다.


지금 내 마음속은 매우 고요하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아무것도 없는 제로 상태이나, 뜻밖에도 상쾌하다. 이제 꾸밀 필요도 없고 누군가와 싸울 필요도 없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 호리에 다카후미를.

이것은 내게 새로운 시작을 위한 첫걸음이다.    



'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그에게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제로가 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손에 쥔 것을 잃을까 두려워서 앞으로 단 한걸음도 옮기지 못하는 거였다.


인생에서 마이너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실패해도 다시 제로라는 출발선으로 돌아올 따름이다.

사람들은 늘 곱셈의 답을 원한다. 그러나 자신은 제로베이스에 서 있다는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다.

제로에 어떤 수를 곱하면 제로밖에 없다. 따라서 출발선상에서는 '곱셈'이 아닌 '덧셈'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성공으로 향하는 진정한 길이라고 그는 말한다.




택배기사는 늘 비워낸 탑차를 보며 위안을 받는다.

자신이 제로인생이라고 인정하는 사실이 가슴속에 평온한 감정을 불러왔다. 반품상자에 붙여진 포스트잇 하나에도 감사함이 생겨난다. 배려가 묻어난 반품상자들을 하나씩 집어와 텅 빈 탑차를 채우며 '제로'와 '덧셈'의 진실을 몸으로 느끼곤 한다.


하지만 텅 빈 공간은 허무하고 허전한 쓸모없는 감정들로 이내 채워지기 쉽상이다. 애써 비워 낸 텅 빈 공간을 이것들로 부터 지켜내기 위해 곁에 있는 소중한 가족을 향한 감정으로 부지런하게 채워 한다.


소중한 이들을 공감한다는 의미는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도해야 하는 걸까.


1979년 26세의 어린 디자이너 패트리샤 무어는 새 냉장고 모델을 디자인하기 위해 브레인스토밍 회의를 하다가 단순한 질문을 하나 던진다. 관절염을 앓는 사람도 쉽게 문을 여는 디자인을 할 수 없을까라는 그녀의 질문을 비웃는 선배의 반응에 분노를 느낀다.

 

그녀는 여든다섯 살의 노인을 공감하기 위해 전문분장사의 도움으로 변신을 한 채 1979년부터 1982년 사이에 북미의 도시 100곳을 돌아다니며 노인들이 일상에서 겪어야 하는 장애물을 겪고 그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를 알아내려고 시도했다. 그녀는 노파인 척하는 여배우가 아니라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처지로 살고 싶어 했다. 이런 공감적 몰입의 결과는 그녀의 제품디자인세계를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다.


공감을 한다는 건 곱셈이 아닌 한 가지씩 더해가는 덧셈의 과정이 철저히 요구되는 기술이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해주는 것은 공감스런 행동이 아니다. 공감은 서로 다른 취향을 찾아내고 인정해 주는 힘겨운 희생이 요구되지만 충분히 소중한 가치가 있었다.


관심 하나씩, 배려의 손길 한 번씩 작지만 서툴게 가족들에게 내밀면서 우리 감정의 계좌는 채워져 간다. 


내 입술과 몸짓을 통해 배출되는 크고 작은 감정적 반품박스 위에  슬며공감의 쪽지를 써붙이려 애써본다.


매일 새벽 다섯 시마다 내 인생은 제로로 세팅된다. 다시 시작하는 맘으로 다잡는다.

제로인생인 나는 오늘도 탑차를 한 번에 하나씩 우고 또 비우고를 반복할 것이다.


다른 이에게 이해를 구하며 산다는 의미가 지닌 소중함을 힘겨운 택배를 통해서도 깨달을 수 있었. 삶 속에서 일이란 귀천이 있을 수 없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바람이 차다. 하지만 다가오는 봄

빈 탑차 뒤걸쳐 앉은 택배기사는 느낄 수 있었다. 봄은 그렇게 설레이다가오고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