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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삼촌 Mar 17. 2024

익숙함과 불안함 사이에서.

불안함 뒤에 오는 익숙함, 그리고 편안함을 누리다.

아내는 젊은 기사들과 친하다. 특히 서른두 살 H는 아들 뻘이지만 택배 현장에서는 '동료기사'이기에 우리를 형님, 누나라고 부른다. 위로 누나들만 있어선지 붙임성이 좋아 아내와 친하다. 까대기를 하며 가족이며 여자친구 이야기 등 사적인 이야기도 자연스레 나눈다. 엄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가진 H를 보면서 아내는 우리 아들들을 떠올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아들들도 엄마인 자신과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으면 바람을 가지곤 했다.

하지만 현실 속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그리 살갑지 못하다. H도 엄마랑은 속 깊은 대화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는 너무나 익숙해서 서로에게 무심해져 버린 건 아닐까.


부모와 자식이라는 틀에 박힌 역할에 빠져버려 서로에게 늘 일정하고도 반복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신선미'와 '독창성'을 실해 버렸다. 지루함만 남은 타성적인 관계로 전락한 건 아닐까.


입가에 맴도는 말과 감정들을 삼키거나 생략하던 때가 무수히 많았다. 답을 알려주는 부모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우리 심정을 외면한 채 돌아 앉은 자식등짝에 슬며시 얼마나 많은 음의 상처를 입었던가.  


차라리 부모, 자식관계가 아니라 택배레일 곁 동료처럼 나란히 마주 설수만 있다면 서로의 대화에 참 많은 변화가 생겨날 것 같다. 


역할에 급급하고 타성에 빠진  속 살가운 대 기대할  없었다.




'새로움'과 '낯섦'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두려움이라는 원초적 본능을 예민하게 자극한다.  


알코올중독인 아버지가 싫지만 딸은 그런 잔상을 지닌 남자에게서 습관적으로 끌리는 서글픈 관성, 그리고 서로의 '익숙함'에 빠져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는 소설 속 불륜연인 '''로제'의 사연(작가 '날고 싶은 자작나무 ' 님 글) 면서 사람들은  불안함이 싫어서 익숙함을 부여쥔 채 모진 인연의 레를 고통 속에 감내하며 살아낸 서글픈 생각이 들었.


불안함을 피해 익숙함 뒤에 숨는 건 나태와 도덕적 타락에 빠지기 쉽다.

정신과 전문의가 강연에서 늘 불안하다는 사연자에게 "차라리 불안함은 안고 요."라며 조언한다.

  

주말 저녁에 홈쇼핑 콜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10일 전에 배송된 상품을 고객이 못 받았다고 했다. 없다는 상품에 대한 불안함에 옷을 챙겨 입던 아내와 나는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 지금 초보처럼 뭐 하는 거지?"

불안함을 뒤로한 채 익숙하게 우리가 찍어둔 사진과 영상들을 통해서 상품을 되찾을 수 있었다.

 

불안함을 안고 간다는 것은 그것을 딛고 경험을 쌓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부지런히 시도하는 것이다. 숙련에서 오는 익숙함은 불안함을 극복한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그렇게 불안하고 불편했을 주말을 편안하고 소중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인생 속 불안함 뒤에는 익숙함이 찾아왔다. 그것은 편안함의 또 다른 모습다.

 



아들이 장장 6개월간의 혹독한 면접을 통과하고 꽤나 지명도 높은 기업의 IT개발부서로 입사하게 되었다. 도전하는 성향이 큰 들은 많이 감격스러워했다.  


아들이 다닐 회사의 근무환경이 궁금해 이모조모 살펴보니 업무강도가  않아 보인다. 다운된 서버복구, 꼬인 프로젝트 해결하기 등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해 스스로 해답을 찾아내는 인재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에이아이(AI)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늘 깜빡이는 '프롬프트' 앞에서 질문을 던지는 인생이 되었다. 구글의 AI '제미나이(Gemini)'를 사용하면서 편의성에 감탄하곤 한다. 필요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고 분석해 주는 것을 보니 새로운 세상이 열렸음을 실감했다.


전문가나 교수들은 'AI'시대는 질문을 던지거나 질문을 기다리는 인생으로 나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로봇과 함께 눈을 깜빡이며 질문을 기다리며 살지 않고 정교한 질문을 할 줄 아는 사람들지배하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문득 오래전 동화가 생각난다. 심성이 착한 가난한 농부가 우연히 소원대로 움직여주는 나무인형을 얻게 된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시키면 다 해주는 신기한 존재였다. 농부는 곧 부유해졌다. 하지만 단 한시도 끊임없이 지시하고 명령을 내려야 했다. 어느 날 아무런 지시도 받지 못한 나무인형은 농부의 갓난 아들을 물이 펄펄 끓는 솥 안으로 던지려는 광경을 보고 기겁을 하며 막아섰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끊임없이 질문을 하며 해답을 찾아가야 하는 'AI'시대는 편의성이 극대화되는 만큼 인생도 그만큼  힘겹고 쉽게 번아웃될 일도 많이 생길  같다는 우려 생긴다.


먼 훗날 언젠가 지쳐서 찾아올지도 모를 큰아들을 포근하게 품어낼 둥지 같은 부모로 변신해 갔으면 하는 소망이 생긴다.


스스로 불안함을 헤치고 길을 찾아나선 큰아들이나 익숙함을 선택해서 우리 곁에 머무는 막내아들 누구라도 상처받지 않고 편안하게 머물며 위로를 받는 그런 쉼터 같은 부모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

 

가르치고 지시하며 답을 찾는 행위 뒤에는 어찌 보면 삶의 모든 정답을 쥐고 있어야 한다는 인간의 오만함이 도사리고 있다.


아내와 나는 부부로 삼십 년을 살아왔다. 갈등과 불안. 그리고 익숙함 사이에서 희로애락을 경험하며 여기까지 왔다.


편안한 관계란 정답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다. 틀리면 틀리는 대로 그냥 상대가 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다.


가장, 남편, 아내, 자식의 역할을 벗어내는 일탈은 불안할 수 있지만 기꺼이 도전할 만한 일이다. 역할을 벗어나 존재 그 자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시도는 전능한 'AI'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것이리라.


불안함 뒤에 오는 익숙함이 주는 평안함을 그리며 오늘도 나는 8 음계 중에 '미'음을 상상하며 텅 빈 가슴속을 가만히 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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