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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삼촌 May 06. 2024

삶이 놀이터로 변하는 순간. 016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장 자크 루소 >

변화는 에서 시작되는 걸까? 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인생은 늘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시달리다 보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틈"조차 없다. 쉴 새 없이 외부에서 들이치는 권력과 압력들에 맞추어 긴장의 고비를 조이며 다.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거라 여기며 다.

 

새로운 회사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한 큰아들과 짧은 통화를 나눈 아내가 한마디 했다.

"우리 큰 아들은 경주마야. 지금은 오로지 달려갈 길 밖에 안 보이는 거 같아. 꼭 젊을 때 당신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새로운 회사에서 적응하느라 온통 정신이 없는 아들은 한 마리 경주마였다. 저 멀리 가물거리는 결승선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중일 때는 그것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 막내아들은 경주장을 벗어난 원의 야생마다. 달릴 땐 갈기를 흩날리며 무섭게 질주하지만 달리고 싶을 때만 달리는 한 마리 야생마다. 지금은 세렝게티 초원 위 아름드리 나무 아래서 하고도 힙하게 숨을 고르는 중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늘 걱정이다. 달리는 녀석은 금세 지칠까 염려되고 서있는 놈은 저러다 려보지도 못하고 주저앉지는 않을심초사다. 부모식을 보며 래저래  앞세우며 살아야 하는 처지인가 보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실은 람이 가진 본질에 대한 무지몽매함에서 기인하는 자 고난이다. 람이란 생적으로 존본능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여건 속에서 주치는 다사다난한 인생사를 어떻게 하든 자신만의 방식과 스타일로 해결하려는 강한 욕구와 의지를 지니고 있다. 정체성이란 그런 생존본 건강하게 분 경험하고 축적이  총체적인 특성을 의미하는 셈이다.

       

우연히 동영상으로 실직자가 된 아이 셋인 48세인 어느 목사님의 사연을 보게 되었다. 담임목사를 사임하면서 실업자가 되는 순간 가장의 책임과 부담감으로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길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무엇보다 설교강단을 떠나 이런저런 일을 하게 되면서 김 씨, 아저씨 등 생소한 호칭 속에서 점차 목사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실직이 두려운 것은 자신만의 생존이라는 목적을 위해 경험할 수 있는 능, 즉 정체성을 상실하는 고통을  하는 사실 때문이다. 사람은 한계적 존재이기에 늘 겹핍감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럴 때마다 직면한 결핍의 해법을 찾아 외부로 시선을 돌린다. 이때 감정은 생존을 위해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사용하는 도구이다. 


하나의 감정에서 수천, 수백만 가지의 생각들이 파생되어 나온다. 감정은 각의 근원이다. 과학적 연구결과에 따르면 생각은 감정의 분위기에 따라 정리되는 것이지 사실에 따라 정리되지 않는다.

모든 생각은 관련된 감정 및 감정의 미세한 변화단계에 바탕을 둔 정리체계에 맞게 마음의 기억저장고에 정리된다.(그레이/라비올렛, 1981)  

하루에도 수없이 불어오는 부의 자극들. 그 과정에서 감정이 압도적으로 밀어닥치고 우리는 위기를  된다.


생각도 하지 않을 때에 기분 나쁜 태도나 눈초리를 깨달을 때, 독을 품은 말을 듣거나 악의 있는 사람을 만나거나 하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어쩔 줄을 모른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길을 가다가 무언가 새로운 고민의 씨앗을 만나지 않을 까하는 두려움이다. 그것만이 단 하나의 고민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내 행복이 깨질 수 있으니까.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중 여덟 번째 산책/장자크 루소>


택배 하는 현장은 루소가 걱정하는 "고민의 씨앗"들이 무수히 넘쳐나며 압도하는 감정을 상대해야 하는 인생의 수련장이다.


아들이 완료문자를 잘못 전송했나 보다. 헬스장에서 음료수 두 박스가 도착 안 했다며 연락이 왔다. 실수를 확인 후 문자를 먼저 보낸 것 같으니 죄송하다며 사과하고 배송 후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했다.

"허, 배송도 안 하고 완료문자를 보내네. 허참."

대부분의 고객들과는 달리 그는 비꼬는 말투와 신경질적인 반응을 뱉고는 전화를 끊었다. 우리는 속이 상해버렸다. 뭐지 이 사람은 왜 러는 거지.


감정이 상한 채로 나는 그곳 헬스장에 상품을 배송하러 들어섰다. 앞서 배송한 지하철역 앞의 헬스장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힘찬 구호소리도, 요란한 러닝머신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조용한 음악만이 정적 속에 흘러나왔다. 아무도 없는 헬스장 문 앞에 상품을 놓고 사진을 찍어 문자를 전송하는 동안 내 가슴속의 감정도 조용히 잦아듦을 느꼈다.


사람들이 나의 감각을 자극하는 동안 그들의 감정상태를 따라 나도 이리저리 방황하게 된다. 감정은 내 속을 무수히 오고 가지만 나의 감정은 곧 내가 아니었다. 짜인 '나'는 현재 느끼는 모든 충동에 휩싸인 채 반응하는 감정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내 속에는 저마다 다른 생각과 다른 삶을 꿈꾸며 꿈틀거리는 자아들이 있다. 그것들은 내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안을 지나가는 감정의 그림자깨달았다. 근본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고 노력하는 일은 부질없다. 그저 공격을 받을 때마다 피가 끓는 대로, 노여움과 격분이 감각을 지배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운 처신이었다.


루소는 이것을 나의 한계라는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행위로 표현했다. <의식혁명>의 저자 데이비드 호킨스박사는 "노력기제"라는 밧줄을 놓아버리는 것, 즉 감정을 항복(Surrender)시키거나 내려놓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외부에서 불어닥치는 자극을 따라 난무하는 생각들에게서 시선을 옮겨 나의 깊은 내면 속에 움직이는 감정을 가만히 주시하는 행위는 내 안의 위대함을 되찾는 항복의 기술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놓아버릴 때는 모든 생각을 무시한다. 감정에만 초점을 맞추고 생각에는 신경을 끈다. 항복하거나, 내려놓거나, 나를 가둔다는 의미는 어떠한 일에서 생겨나는 격한 감정에 저항하는 바람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저항할수록 감정은 살아나며 지속되기 때문이다. 감정에서 자유로워지면 애착에서 풀린다.   

      

모든 것은 마찬가지로 심한 바람에 흔들리고 바람이 멎으면 금방 고요해지는 그 변덕스러운 기질에서 오는 것이다. 나를 흔드는 것은 나의 격한 천성, 나를 가라않히는 것은 나의 태평스러운 천성이다.


인간들이 나의 감각을 자극하는 동안은 나는 그들의 뜻대로 된다. 그러나 그것이 잠시라도 중단되면 그 순간 나는 자연이 바라는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  그야말로 남이 어떤 짓을 하든 나의 한결같은  상태로 돌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운명이 어떻게 행동하건 나는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믿는 그 행복감을 맛보는 것이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 장자크 루소>




연휴인 아침에 아내와 식사를 끝내고 머리를 깎고 염색을 했다. 택배를 하고 난 후 나는 내 머리를 미용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아내에게 내맡겼다. 이것은 아내에게 나의 전 존재를 내맡겼다는 의미로도 해석가능하다. 이발세트는 초저가 상품으로 테무에서 만오천 원에 구입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아들의 만류에도 나는 가만히 아내와 초저가 이발기구세트에게 나의 머리카락을 내려놓았다.

     

샤워 후 거울을 통해 살펴본 나의 모습은 청담동 미용실에서 깎은 것만큼 만족스럽다. 아내는 나쁘지 않다며 연신 내 머리를 신기한 듯 보고 또 살펴본다. 젊은 감각의 눈에는 어찌 보일까 싶어 막내아들에게 보여주니 쿨하게 "괜찮네."라는 대답이 되돌아온다. 만족해하는 내 모습을 보고 아내가 행복해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행복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런 행복을 찾아내려는 일을 단념하자 낯선 산자락에 자리 잡은 나의 인생공간과 가족 사이에서 새로운 놀이(play)하는 삶이 시작되었다. 매일 만나고 하루종일 같이 지내며 일터와 부엌, 그리고 식탁 위에서 놀이터가 펼쳐진다.


불가피한 생존의 수준을 뛰어넘는 만족스럽고 자유로운 삶이란 자신 이외의 사물이나 사람에게 점점 덜 의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것은 즐길 수는 있어도 그것들이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 비로소 삶은 타인과 벌이는 놀이, 놀이터로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노년의 장자크 루소를 따라 세 번째 산책길을 동행하며 뒷동산을 올랐다. 나와 달리 그는 비장했다.


내가 이 나이가 되어 얻은 모든 경험은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고 또 미래에도 이로울 것이 없는 셈이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경기장으로 들어가서 죽을 때에나 거기에서 나온다.

는 나의 내면을 엄격히 검토하여 앞으로의 내면생활을 통제하고 감추고 그렇게 함으로써 죽음이 임박했을 때 내가 원하는 경지에 이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완전히 세상을 포기하고 고독을 향한 갈망을 품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내가 계획한 일은 절대로 은둔생활에서 밖에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나에게 새로운 사상이나 지식을 배우려 애쓰지 말고 내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 머물러서 내 능력이 초월하는 곳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오직 죽음도 그 가치를 없애지 못하는 것들을 위해 살라고 조언해 줬다.  


그러나 인내, 온화한 마음, 체념, 청렴, 공평무사한 정의 같은 것은 모두 사람들이 자기와 더불어 가지고 갈 수 있으며 끊임없이 살찌울 수 있는 재산이므로 죽음도 그 가치를 없애지는 못한다.

나는 단 하나의 유익한 연구에 나의 노후를 바칠까 한다.


아마도 이번 해에는 나는 감정을 내려놓으려, 그를 만나러 더 자주 숲 속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것 같다.

바람이 햇살이, 그리고 싱그러운 하늘이 참 감사하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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