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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삼촌 May 26. 2024

택배 하면서 깊은 심심함에 잠기다. 015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 / '사실 없는 자서전 ' 중에서>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운 센터에 도착한 나는 탑차문을 연다. 전날의 흔적인 하얀 스티로폼 가루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것들 조차마치 밤하늘의 별인양 새하얗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무신경하고도 습관적인 나의 빗자루질에 탑차 밖 어둠 속으로 이내 흩뿌려져 사라진다.


인생이란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밤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밤별들과 그것들을 향해 마주한 우물처럼 서로 좁혀질 수 없는 거대한 간극이 존재했다.

      

그러나 무엇인가 더 있다.....

이 느리고 공허한 시간 속에서 온몸으로 느끼는 슬픔이 영혼에서 마음으로 치솟는다.

모든 것은 내가 느끼는 감각이자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외부적인 무엇이라는 쓰라린 자각이다.

 

나와는 상관없이 다가서고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자신을 결코 실현할 수 없다는 불안감은 갈증을 불러왔다. 늘도  내가 아는 '지식과 삶이 절반씩 뒤섞인 혼돈의 세상' 론 근심스레, 때론 체념 속에 얻은 고요함으로 간신히 헤집으며 나아간다.

    

 안의 모든 것은 항상 다른 무엇이 되려 한다.

영혼은 칭얼거리는 어린아이를 못 견디듯 스스로를 못 견디고 불안은 점점 커지면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나는 모든 것에 흥미를 느끼지만 무엇에도 붙들려 있지 않다. 모든 일에 반응하지만 늘 꿈꾸는 상태다.


이윽고 하나, 둘씩 동료 택배기사들의 탑차들이 들어오고, 레일이 요란한 굉음과 함께 돌아가기 시작하는 순간 비로소 나는 꿈속의 드높은 왕좌로부터 이름 없는 택배기사로 다시 되돌아온다. 


무것도 아니기에 누리는 밤의 영광이여,

아무것도 모르는 찬란함이 빛나는 침울한 왕좌여..


그저 평범하고 이름 없는 택배기사인 나는 소음과 먼지가 진동하는 작업현장 속에서 내 영혼을 구원이라도 하듯이 부지런히 손발을 움직인다. 페르난두 페소아, 그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하는 일은 아무 가치가 없고 우리가 하는 것은 단지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침묵을 흘려보낸다.

아무 형태 없는 세상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산다는 것은 타인의 의도대로 택배를 나르며 사는 일이다. 르무통운동화, 수향미, 건강식품, 원터치캠핑텐트. 나와는 상관없는 무수한 상품들이 흘러가고 밀려온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생각은 자유롭고 흘러오는 크고 작은 택배상자들을 하나씩 붙들어 부지런히 탑차에 옮기는 동안 마법에 걸린 듯 잠자던 내 영혼은 산책을 시작한다.


나는 내 느낌에 삶의 풍경화를 그린다. 내 감각들로 휴식을 얻어내고 일군다. 때로는 힘겹고 고달프지만 삶이 기에 있기에 곁에서 하염없이 일하는 동료 택배기사들이 한없이 정겹기만 하다.

 

지금 이 순간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나는 시간을 한껏 잡아 늘리고 싶고, 아무 조건 없이 나 자신이 되고 싶다.


한 뼘씩, 한 뼘씩,

원래 내 것이던 내면의 땅을 정복했다. 

조금씩, 조금씩

무의미하게 머물렀던 그 늪을 되찾았다. 


나는 무한한 존재인 나를 낳았으나 나 자신을 나로부터 억지로 끄집어내야 했다.


그렇게 나는 반복적이고도 분주한 일상의 움직임 속에서 나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학자 쟝 보드리야르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소비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가치를 드러낸다고 진단했다. 상대보다 탁월한 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해 상류사회는 차별적, 공격적으로 명품을 소비한다. 하류사회는 상류사회와의 간극을 좁히려 뒤쫓아가는 소비를 한다. 


소비가 경쟁적으로 이루어지며 소비의 욕망은 끊임없이 자극받는다. 그 결과 궁핍과 결핍에 시달리는 피로 속에서 우리는 수동적인 삶의 존재로 전락했다.


보드리야르는 이런 자본주의의 소비적 폭력성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으로 대응하는 것, 즉 <무관심의 절정>이야말로 우리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된다고 말한다.


무관심의 절정이란 내가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던 모든 것에서 눈을 돌려 스스로를 가두어버린  '깊은 심심함'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리라. 그동안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게 우리의 삶이었고, 자신에 대한 오해가 우리가 하는 생각의 전부였으니 말이다.


나는 스스로 행동한 게 아니라 시키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 내 생각의 가장 깊은 중심에서 나는 내가 아니었다...

한 번도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으며 그저 생각과 의식으로 시간을 채우며 존재했을 뿐임을 이제 알겠다.


느끼는 것과 보는 것 사이에서

항상 꿈꾸는 상태로 떠다녔던 나라는 존재의 실상에 대한 갑작스러운 발견이

선고만을 앞둔 유죄판결처럼 나를 짓누른다.


세상을 벗어나 스스로를 확실히 존재하며 느끼는 순간 나는 내가 아닌 사람으로 살게 된다. 마치 영문도 모른 채 낯선 마을에 들어선 나그네 신세가 된다. 그리고 낯선 마을의 다리 한가운데서 깨어나 강물을 굽어보며 그 어떤 순간보다 내가 확실히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텅 빈 손을 휘저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믿게 되고 저 수면 아래를 헤엄치는 물고기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른 모든 사람의 인생처럼 나의 삶도 신비로우면서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고귀한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내 곁에 있는 바로 그것.


인생이란 얼마나 예측 불허의 것인가.

그러니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와일드/ 셰릴 스트레이드>




<낮잠/ 빈센트 반 고흐, 밀레의 작품을 모사함>

"비참한 고통과 태양 사이의 중간쯤 어딘가에" 자신을 위치시키겠다는 까뮈의 말은 예측불허의 인생 속에서 스스로를 자각한 존재로 살아가는 부담감과 살아가야 하는 방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는 인생 속에 존재하는 거대한 간극의 실체를, 그리고 간극 사이에서 살아가는 법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반 고흐가 그린 <낮잠>은 고단한 농사일과 휴식의 간극 사이에서 평온함이 물씬 풍겨 나는 풍경을 그려낸다. 이 작품은 동일한 주제를 다룬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çois Millet, 1814-1875)의 작품을 모사한 것이다. <낮잠>은 반 고흐가 프랑스 프로방스(Provence) 지방 생 레미(Saint-Rémy)의 정신병원에 기거할 무렵에 그려졌다.

  

인생에서 가장 힘겹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고흐는 고된 삶으로부터 휴식을 취하는 부부의 모습을 통해서 부드럽고 자유스러운 인생의 풍경을 온화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그림 속의 부부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삶 속에서 떠오르는 부부들의 모습이 쳐져 다.


꽤나 무거운 짐이었지만 상가 이층 계단으로 날라야만 했다.

새로 생긴 파스타와 커피를 파는 카페였다. 힘겹게 상품을 내려놓고 돌아서려는데 황급하게 카페주인 부부가 불러 세운다. 커피를 권하는 바람에 잠시 기다리다가 나는 놀라고 말았다.


차가운 아메리카노 두 잔을 내어주면서 한잔에는 시럽을 따르고 표시를 해서 주는 게 아닌가.

우리 부부가 함께 일하는 것을, 그리고 아내는 꼭 시럽을 탄 커피를 마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표시된 것은 사모님 드리세요."라며 건네는 부부의 세심한 친절에 나는 그만 감동을 받았다.


우리가 배송하는 또 다른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는 자그마한 김밥집이 있다. 부부와 젊은 아들이 함께 일했다. 점심때 배송을 하러 잠시 들리면 전화주문과 매장손님으로 인해 가족들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광경을 보곤 했다. 이른 새벽에 출근하면서 그 김밥 집에 불이 켜져 있을 때면 우리는 유난히 관심 있게 시선이 가곤 했다. 부지런히 김밥을 말며 새벽을 여는 부부의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는 남다른 친근감이 느껴지곤 했다.


내가 일하는 택배센터의 조업사 사장은 나처럼 가족이 함께 일을 한다. 머리가 허연 그는 나도 그처럼 아내와 아들이 함께 일한다는 사실을 아는지 마주칠 때마다 서로 말없이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나누곤 한다. 아들이 부모와 일하기 너무 힘들다며 툴툴 댄다는 그의 아내의 말을 전해 들으며 가족이 함께 하는 고단함과 든든함을 너무나 잘 알기에 절로 공감이 되고 위안도 받는다.

      

단 한 번의 깊이 있거나 살가운 대화를 서로 나눈 적이 없어도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친근하고도 남다른 동지애가 느다. 이 세상에는 그렇게 살가움을 느끼는 경우도 존재했다.

 

때론 나는 차라리 말 못 하는 벙어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정신없이 택배를 하다 보면 고객에게 오는 전화를 받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문자 메시지로 고객응대를 한다. 배송된 물건의 내용물이 파손되었는지 화가 나서 전화를 한 고객이 있었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고 문자메시지를 달라고 요청했더니 그사이 고객이 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항의하는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정중한 사과문자와 함께 파손경위에 대해 해명을 했고 우리는 서로 이해를 했다.


택배는 무수한 손길을 거쳐서 오기에 택배기사도 그 모든 과정과 정보를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모든 책임과 비난의 대상이 다. 만일 그런 상황에서 대화를 서로 나누었다면 아마도 크게 감정이 상하고 싸울 수도 있었다.

 

가족도, 친근한 관계에 있어서도 세치의 혀를 의지하는 말이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해를 입하는 경우가 참 많다. 말로 상처를 주고 입으로 스스로의 위신을 깎아먹기도 한다. 말이란 자신을 화려하게 드러낼 때 필요하고 유용하다. 말과 돈은 손쉽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손쉬운 세상에서 최적화된 가치를 지녔다.

 

하지만 사람의 본심을 전하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견하는 것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해악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왜냐하면 진심이란 손쉬운 것들 속에는 제대로 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말과 돈을 걷어내고 동 만으로 오롯하게 진심을 전한다는 것은 상당히 번거롭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가장 효과적이고 유효하며 진실된 위력을 지닌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음을 택배를 하는 나날이 깨닫는다.

  

내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아들을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지를 돈이나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려 시도할 때마다 나는 말과 돈을 의지해서 손쉽게 가족을 대해왔다는 사실만을 뼈저리게 느끼곤 다. 돈과 말을 앞세워 행동하는 번거로움과 고충을 회피하려던 나 자신의 비위생적이고도 냄새나는 위선만 보게 될 뿐이다.  

 

몸을 씻듯 운명도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듯 삶도 갈아줘야 한다.

먹고 자는 일처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리해야 하고

그것을 우리는 위생이라 부른다.

 

"나의 크기는 내가 보는 것들의 크기"이지 내 키의 크기가 아니다.

텅 빈 물질의 거대한 간극사이에 난 공간을 향해 나는 두 팔을 벌리고 온전히 나의 것을 주장하며 선언한다. 한낱 볼품없는 우물에 불과하지만 밤별들이 무수히 떠오르는 밤이 찾아오면 광대한 밤하늘로부터 전해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평화가 내 위에 그리고 내 안에 살며시 내려앉는 순간 우물은 저 높은 별들에게 까지 이어진다.


인생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가는 마차를 기다리며 머물러야 하는 여인숙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깐.

이 여인숙에 머물며 기다려야만 하니 감옥으로 여길수도 있겠고 여기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 사교장으로 여길수도 있겠다.


나는 문가에 앉아 바깥 풍경의 색채와 소리로 눈과 귀를 적시며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만든 유랑의 노래를 천천히 부른다.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밤이 오고 마차가 도착하리라.

나에게 주어진 산들바람을 즐기고 그렇게 즐길 수 있도록 주어진 내 영혼을 즐길 뿐

더 이상 묻지도 찾지도 않는다.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밀려온다. 그 깊은 심심함 속에 가만히 내 영혼을 누인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할 뿐이다.







P.s. 이 글을 쓰면서 자꾸 생각나서 듣곤 했던 노래예요. 그거면 돼요. 지금 이 순간 이걸로 충분하다는 가삿말이 참 좋네요.

https://youtu.be/0jZWYTh8fr4?si=XiEEt57ifIcPvy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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