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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삼촌 May 19. 2024

가족은 특별한 의미에서 피로한 사람들이다. 014

'공동의 피로'가 우리를 하나로 엮어주다. <피로사회/한병철>



장자크 루소는 다섯 명의 자녀를 고아원에 버렸다.

1745년경 파리는 생활고로 자식을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루소의 당시 생활은 무척이나 궁핍했다.


루소 스스로가 변론하기를 자녀들이 처할 위험한 환경을 피해 가장 안전한 교육이 고아원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들을 그곳에 보냈다고 했다.


하지만 자식을 버린 비정한 아버지라는 꼬리표와 비난은 평생 따라다녔고 그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속죄하는 마음이 집념이 되어 자녀를 향한 사랑을 논하는 불멸의 저서 <에밀>이라는 교육론을 쓰게 하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의무를 다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아버지가 될 권리가 없다.

아버지는 자기 자식을 스스로 양육하고 교육해야 한다.

빈곤이나 일, 현실 등이 그 의무를 면제해주지 못한다.

.. 신성한 의무를.. 게을리하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회한의 눈물을 오랫동안 흘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

 

자식을 버린 아버지가 치를 대가가 어떠한지를, <에밀>   자신의  생생하게  현한다.


가난해도 실직이 되어도 아버지는 자식을 결코 버려서는 안 된다.

아버지는 회한의 눈물과 평생 치유되지 않는 고통의 무게만 한 '신성한 의무' 가족에게서 그렇게 '부여'받았다.   




아버지의 의무만큼이나 자식들이 짊어져야 할 그것결코 만하지 않다.


전에 다니던 직장의 동료는 친가, 처가의 양쪽 부모님이 모두 쓰러지셔서 회사 가까운 곳인 사설요양원에 모셔야만 했다.


출퇴근하며 양쪽 부모님을 번갈아 가며 찿아뵙고 보살피느라 자신의 삶이 없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사느냐는 안타까워하는 물음에 "자식인데 어쩔 수 없지 않냐"는 자포자기하는 듯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려워졌다. 나 역시 피할 수 없이 겪어야 할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장모님이 돌아가시자 처남은 통곡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도 픔이지만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죄스럽게도 속으로 병원비와 간병비 걱정이 먼저 들었다며 "엄마, 미안해."라며 더욱 오열했다.

경제적 부담이 부모를 염려하는 마음을 앞섰다는 책감이 자식의 가슴후벼 파고 있었다.


서울대에서 가족학을 강의하는 진미정교수는 저출산과 고령 인해 우리 사회의 가족은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고 진단했다. 진단의 핵심은 가족이 급속하게 노화된다는 것이다. 2050년에는 1인가구, 부부를 중심으로 한 2인가구의 비중이 75% 이상을 차지한다. 그런 1인, 2인가구의 구성원이 70대 이후가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결혼'과 '가족'에 대해 평범했던 사회적 인식이 '사치재(奢侈財)'로 변화하면서 가족규모가 급격히 축소화되고 있다. 진미정교수는 이 과정에서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족의 '계층화''양극화'를 우려했다.


경제력이나 친밀한 관계망이 잘 형성된 가족과 그렇지 않은 가족과 개인으나뉘어 서로 극명하게 차이나는 인생 노년기를 보내게 된다는 의미다. 경제적, 관계적 불평등이 한층 더 심화된다는 것이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가족이란 인생의 불안한 유년기와 노년기를 위한 '돌봄 공동체'같은 든든한 '둥지'인 걸까? 아니면 서로를 위한 무한한 '돌봄의 의무'가 주는 부담힘겨움 때문에 남몰래 벗어내고픈 '굴레'인 걸까?


만일, 경제력도, 가족 간의 친밀한 관계망도 없는 흙수저 처지라면 '가족'이란 거추장스러운 '인연'이자 불필요한 사치품인 걸까.

 

과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족이란 무슨 의미를 주는 걸까.

  

가족 "동질적인 것의 공간"속에서 함께 살아간다. 그 안에서는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혈연이라는 단 한 가지 사실만으로 가족 구성원의 모든 차이는 배제되고 그저 동질적인 존재들이 된다.


그러나 동질적인 관계 속에는 보드리야르가 "같은 것에 의존해서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폭력'이 존재한다. 그것은 누군가를 박탈하거나 배제시키는 가시적인 폭력이 아니라 포화시키면서 서서히 고갈시키는 것, 즉 심리적으로 탈진과 우울감을 불러오는 신경성 폭력이다. <피로사회>의 한병철은 그것을 "내재성의 테러"라고 표현했다.


가족은 서로 간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혼재된 삶을 살아간다. 가족이란 '프레너미(Frenemy, Friend+Enemy의 합성어)'는 단어처럼 친밀상처가 공존하는 삶 속에서 서로를 소진시며 서서히 메말라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오랜만에 막내여동생을 만났다.

오십 줄에 들어선 여동생은 낮에는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밤에는 간호조무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원래 여동생은 사격선수 출신이었다. 세계월드컵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는 등 화려한 전성기를 보내기도 했다. 선수은퇴 후 사격코치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요양보호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아버지는 여동생에게 일평생 애증이 교차하는 존재였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탓인지  막내여동생은 유달리 아버지를 따르고 챙겼다. 버지가 쓰러지신 후 요양원을 알아보다가 관심을 가지게 되어 일하게 된 것이다. 적지도 않은 나이에 간호조무사가 되려는 이유를 묻자 "아버지가 어떤 환경 속에서 돌아가셨는지 많이 궁금해서...."라는 끝말을 흐리는 답을 했다.

 

여동생은 아버지에게 상처도 많이 받았다. 아울러 그런 아버지에게 반항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런 기억이 지금에 와서는 자책하는 쓰라린 파편이 되었.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막냇동생은 아버지체취와 흔적을 따라 그리움과 아픔이 혼재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끝없이 주어지는 돌봄의 의무크고 작은 신경성 폭력들 앞에서 가족은 서로 갈등하며 서서히 탈진해 간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겪어야 하는 우울하고도 개별적인 피로감은 파괴적인 자학과 자책으로 이어지며 이 시대의 가족들 위기의 벼랑 끝으로 내몰고 다.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치료비가 세탁기만큼 나왔다. 아내는 20년도 넘은 드럼세탁기를 이제는 바꿔야 하겠다며 알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고스란히 남편 입안으로 세탁기가 사라지게 생겼다. 문득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가 된 아버지의 흔적 속에 까맣게 그을린 철제 틀니가 생각났다. 죽으면 버려질 것들에게 인생은 참 많은 돈을 허비하사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후

나는 인생이 허망한 것에 많이 매여 다는 사실이 깨달아졌.

   

나이가 들수록 나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이 점점 진하게 나타난다. 아내는 싫어하지만 왜인지 나는 아버지가 자꾸만 생각나고 그리워진다. 그러면서 두려워지는 것도 있다. 아버지처럼  역시 가족들에게 싫든좋든 간에 상처를 주는 가해자로 살아가지는 않을까 두렵다.

 

때때로 함께 일하는 아들이 나를 향해 아빠라고 부르며 다가올 때마다 젊은 날 내 모습이,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버지가 된 내 모습이 중첩되어 다가오는 듯 느껴질 때면 잠시 복잡한 감정이 들면서 한동안 착잡해지고는 한다.


가족은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지만 각자의 삶 속에서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며 끝없이 기억을 대물림하면서 하나로 엮인 채 살아가 있었다. 그것은 돈도, 끈끈한 가족애도 아닌, 아니 그런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부여잡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성과사회로 변모하면서 끝없이 '자기 착취'의 사회가 되었다. 철학자 한병철은 사람들은 개별화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에 모두 빠져버렸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피로를 피터 한트케는 <피로에 대한 시론>에서 "분열적인 피로"라고 정의했다.

  

둘은 벌써 끝없이 서로에게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자 자기에게 가장 고유한 피로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그러니깐 우리의 피로가 아니었고 이 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이런 "분열적인 피로"는 인간을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분열된 피로는 아무 말 없이 필연적인 폭력을 부른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조그만 자극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며 사느라 이미 탈진해 버렸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오늘날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으로 치닫고 있으며, 부산하게 활동하는 자를 이렇게 높이 평가하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며 한탄했다.


그는 어떠한 자극에도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 즉 사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활동하는 삶이 아니라 사색적인 삶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 본연의 존재로 만들어 준다고 믿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꿈의 새가 깃들어 육체적인 이완을 도모하는 잠자리와 정신적인 이완을 의미하는 깊은 심심함이 흐르는 사색의 둥지는 서서히 괴되어 사라져 가는 중다.




가족이라는 간에서 겪게 되는 함께하는 <우리의 피로>는 정체성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풀어주며 새로운 틈새를 열어준다. 그 틈새는 아무도 그 무엇도 지배하지 않는 친절의 공간, 무차별성의 공간이다.


우리는 보고 또 보인다.

우리는 만지고 또 만져진다.

접근을 허락하는 피로, 만져지고 또 스스로 만질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하는 피로.

그런 피로를 통해서 비로소 머물러 있는 것.

한 곳에서 체류가 가능해진다.


피터 한트케는 이것을 근본적인 피로라고 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탈진상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것은 영감을 준다. 피로의 영감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는 무엇을 내버려 두어도 괜찮은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아들이 다가와 껴안으며 "아빠. 내가 돈 많이 벌게."라고 한다. 나는 돈은 필요 없고 너만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진심으로 아들이 나처럼 <자기 착취>적인 삶은 안 살았으면 좋겠다.


가족과 함께 하면서 겪는 피로를 통해 세계는 경이감을 되찾는다.

이 안에서의 모든 형식은 느리다. 모든 형식은 우회적이다.

효율성과 가속화의 경제학은 형식의 소멸을 가져온다.


언젠가 하루종일 아버지와 단 둘이 난생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시간을 보낸 그때가 생각난다.

함께 온천장에 가서 온천욕도 하고 식사를 함께 했다. 마냥 아이처럼 좋아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나도 슬그머니 흐뭇하고 행복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메뉴를 선택하시는 취향도 어쩌면 나와 꼭 같은지 새삼 놀랐다.

달빛 반짝이는 해수욕장 밤바다를 보면서 나에게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으시던 모습과 살갑게 반찬거리를 내놓으며 저녁을 챙겨주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자꾸만 생각이 난다.

 

가족이 함께 하면서 겪는 피로는 나는 너한테 지치는 것이 아니라 한트케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너를 향해 지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앉아 있었고 말을 하기도 하고 침묵을 지키기도 하면서 공동의 피로를 즐겼다."

피로의 구름이, 에테르 같은 피로가 당시 우리를 하나로 엮어주고 있었다.


가족은 경제력도, 따스한 친밀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함께 하며 피로를 느끼며 서로를 향하는, 특별한 의미에서 피로한 자들이 모인 작고 소중한 둥지였다.





Ps. 한 주간 음미하며 즐겼던 노래랍니다. 노래를 들으며 가족에 대해, 부모님이 참 생각이 많이 나더군요.

 https://youtu.be/cf8IH90zgKA?si=dvinj0uztX24eI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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