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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삼촌 Dec 01. 2024

폭설이 내리던 날.

사람들은 자신의 키만큼만 세상을 바라본다.

새하얗게 내리는 흰 눈은 성탄절을 <화이트 크리스마스> 몽환적이고도 특별하게 변화 매력을 지녔. 하늘에서 하얗게 흩날리는 송이들은  땅 위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화려한 주택가나 어둡고 습한 쪽방촌까지 어디든 가리지 않고 동일하게 감싸듯 뒤덮는다.


삶이 힘겹고 고달플 때면 세상의 든 것들을 하얗게 마법처럼 하나로 엮어내고는 찬란하게 빛나는 설경을 보노라면 절로 감탄이 나오며 깊은 위로를 느꼈다. 눈이란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동안 고단하고 힘겨웠을 인생들을 위해 경이롭게  품어주는 천사의 날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우리가 택배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눈이 지닌 전혀 다른 모습을 직접 경험하기 전까진 말이다.


백 년 또는 백칠 년 만에 쏟아진 폭설이라고 한다. 눈송이들이 가벼운 솜털처럼 흩날릴 때만 해도 우리는 비가 아니라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하루종일 세차게 내리고  눈들은 택배를 하던 우리에게 공포스러운 상황들을 서서히 안겨주기 시작했다.


감미로운 날개라고  눈송이들이 우리의 발걸음과 택배를 실은  바퀴들을 깊은 수렁 속으로  빨아들 족쇄를 채우고 심통을 부렸다. 택배차 타이어와 브레이크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습기를 머금은 무거운 눈들은 빈약한 골조의 택배작업장 지붕을 흉폭하게 무너뜨려 인명피해가 생겨났다.


우리를 힘겹게 했던 장맛비는 단지 불편하게 했지만 폭설은 우리의 생명을 위협했다. 헛도는 차량바퀴에 죽음의 공포가 섬찟하게 다가왔고, 택배짐을 나를 수도 없도록 손과 발, 그리고 차량 등 우리의 모든 것을 묶어버리는 눈더미의 횡포 앞에서 우리는 당혹감을 넘어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감미로운 날개와 섬찟한 크레바스처럼 좁혀지지 않는 간극사이에서 마음 혼란스럽다.

 

이 와중에도 자신의 택배는 언제 도착하냐는 독촉전화는 쉴 새 없이 울린다.

택배회사는 결코 폭설 등 어떠한 천재지변 중에도 택배기사들을 위한 안전조치는 전혀 하지 않았다. 오직 안전하게 배송하라는 문자만 배송앱에 공지로 띄울 뿐이다. 택배사업자들의 그런 행태에 익숙해진 선임 택배기사들은 무덤덤해 하지만 혈기 왕성한 신참 택배기사는 "사람취급을 안 하는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 그만 신참답게 울분을 신선하게 터트린다.


택배기사들의 야속함과 택배 배송을 기다리는 들의 원망이 교차하며 캄캄한 밤하늘에서 수많은 눈꽃송이가 되어 쏟아내린다. 택배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눈더미와 눈사람들이 새하얗게 빛났다.


사람들은 꼭 자기 키만큼만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이 실의 전부라고 여긴다.

눈송이도,

곁에 있는 랑하는 이들도,

돈도,

택배도,

그리고 신의 인생도, 타인의 인생도 말이다.


왜 사람들은 자신이 겪는 상황만 전부라고 여기는 걸까.

  

신이 경험한 수많은 경험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취급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하며, 그것이 전부이듯 착각하며 나머지는 가치 없는 폐기물처럼 내버리며 오늘 하루를 그렇게 살아간다. 그래야 인생의 방향을 정상적으로 제대로 잡을 수 있다는 듯이....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인 '그레고리우스'는 헌책방에서 우연하게 마주한 중고책 속의 글귀를 통해 58년간 단 한 번도 궤도와 방향을 바꾸지 않았던, 아니 바꿀 수 없었던 자신의 인생궤도 대한 탈선을 결심한다.


-움직이는 기차에서 처럼, 내 안에 사는 나.

내가 원해서 탄 기차가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목적지조차 모른다.


그는 용기 있게 즉시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오른다. 58년간 집착해 왔던 모든 것을 뒤로한 채로...

   

폭설 가운데 무거운 절임배추를 15박스를 시킨 고객이 계속 독촉전화를 했다. 악천후 배송상황과 맞물려 고통스러웠다. 긴 통화 끝에 자신이 직접 와서 찾아간다고 했다. 육칠십 대 노인부부였다. 아마도 아는 지인들이 모두 모여서 김장을 하려고 기다리는 중이었던 것 같다. 지인들을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 아마도 미안해서 택배를 독촉하고 직접 찾으러 왔으리라.

   

불과 배송 5분 거리를 앞두고 고객은 자신의 무거운 택배들을 챙겨서 자신의 용차에 실어갔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각자 수십 년간 선택의 여지가 없고, 목적지조차 알지 못한 채 달려왔을 각자의 인생기차를 타고 스치듯 지나쳤다.


내 속의 감정들은 내가 경험한 아주 작은 범주 안에서 그것이 옳다며 일렁이고 있었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글귀의 의미가 상황에서야 비로소 나에게 깊이 와닿는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의 상상에 대해 아는 것이 있었던가?

왜 우리는 자식의 상상에 대해 이다지도 모를까?

어떤 사람이 상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에 대해 알지 못하면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과연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사람이 자신의 궤도에서 이탈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그 고통을 잘 안다.

그럼에도 깃털처럼 자유로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기꺼이 탈선을 감행할 용기가 필요함도 알아야 한다.


내 앞에 있는 이가 무엇을 상상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순간순간 치솟는 내 가슴속 분노의 깊이를 깨닫고 '그레고리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고 부벤베르크 광장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하며 눈에 보이는 사물들에게 베른 사투리로 말을 건넬 수 있어야만 했다.


천사의 날개처럼 위로가 되는 눈,

크레바스처럼 절망을 안겨주는 눈,

어느새 어둑해진 밤하늘에서 새하얗게 쏟아지고

짐을 하나 가득 실은 택배차 위로 켜켜 쌓여만 간다.

나는 오직 새하얗고 영롱하게 빛나던 설경을 경이롭게 바라보던 순간을 상상하며 허리를 숙인 채   부지런히 손길을 놀린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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