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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아래 사는 삶

삶 속에서 열정과 욕망보다 소중한 것들에 대하여

by 코나페소아

택배를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하얀 캡모자와 흰색 니트 홈웨어를 편안하게 갖춰 입은 동남아 중년 남성이 특유의 짙은 눈썹과 함께 큰 눈망울로 우리를 바라봤다. 한국어로 어린 딸에게 차근차근 뭔가를 조언했다. 공부하는 일정을 챙기며 조언하는 듯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자칭 '명품감별사'라는 아들이 나에게 넌지시 말을 한다. 외국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했다고 알려준다.

지금 내가 입은 검정털 후리스의 소매는 종이박스와 스티로폼 가루들이 자잘하게 눌어붙어 있다. 문득 내가 이방인보다 오히려 더 이방인처럼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금세 우울해졌다. 이 우울한 감정의 정체는 뭘까.

오랜 지인부부가 5년도 더 된 시간이 흐른 오늘, 보고 싶었다며 연락이 왔다. 병치레를 하고 난 뒤 어느 정도 회복되자 지인들을 만나 대화를 하다가 우리 부부가 많이 생각났다고 했다. 잘 지내냐며 이런저런 근황을 서로 주고받았다. 전화를 끊고 나니 미 오래전 잊고 있었던 우리 과거 존재가 다시금 꿈틀거리며 되살아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밀려드는 알 수 없는 회한과 서러운 이 감정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찬바람이 몹시 불던 날, 배송지에 도착했으나 차문을 열고 내리기 싫었다. 땡전 푼 없이는 한걸음도 옮길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사람다운 구실을 하며 살자고 기꺼이 선택한 택배일이건만 지금 내 마음 판에서 거칠게 요동하며 투정하는 이 감정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저것 가질 수만 있다면 행복해지리라고 우리는 굳게 믿는다. 살면서 겪는 대부분의 불행이 불완전하고 결점 많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다. 따라서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억누르기 위해서 과도한 욕망을 생의 유일한 신앙이자 수단으로 삼으며 억척스레 살아가려 한다.

강렬한 욕망은 모두 기본적으로 지금과는 다른 인간이 되려는 욕망이다. 절박하게 명성을 갈망하는 것도 아마 현실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리라.


시뻘건 용암과 새까만 화산재를 내뿜으며 폭발하는 활화산은 강렬하게 욕망을 분출하는 우리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았다. 틀거리는 욕망을 품은 채 우리는 제와 오늘 나, 그리고 내일의 나는 서로 전혀 상관없는 존재들로 각내어 버렸다. 욕망 이끌려 그저 매 순간 다른 인간으로, 다른 존재로 살기만을 갈망하며 살아갈 뿐이다. 오늘 우리는 저마다 욕망이 들끓는 분화구를 가슴에 품은 채 잿빛 연기를 흩뿌리며 허무하게 이리저리 의 길 위를 유랑다.


가족과 함께 차가운 땅바닥과 힘겨운 택배현장을, 그리고 매서운 인심 속을 맨몸으로 나뒹굴다 보니 내가 지닌 결함들이 나둘씩 나의 시야 속으로 들어왔다. 내가 소유할 수 있는 물질적인 것들을 통해서, 부여 내 생의 모든 역할들은 손쉽게 감당하려던 생각들이 얼마나 안일하고 얄팍했는지를, 그리고 그런 것들이 결국에는 내 생의 든든한 자존심과 자부심이 되어주리라 여겼다. 하지만 모든 소욕의 실체는 지독스레 어리석고 속물러운 내 욕망이었음이 뒤늦게 깨달아졌다. 매스꺼운 구역질이 났다.


자신에게 존재하는 결함들이 드러날 때마다, 진 욕망으로 그것들을 충분히 덮어내지 못했다는 자책이 생겨날 때면 우리는 일순간 거대한 활화산처럼 폭발다. 가까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용암으로 사그라뜨리고 화산재로 뒤덮어 버릴 때까지, 곁에 함께 한 이들이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깊은 아픔에 스러질 때까지 멈추지 못한다.


활화산 같은 인생들이 로 함께 산다는 것은 죽음 같은 일이다. 가까이하는 동안 끊임없이 상처와 고통을 감내해야 는 순간 인은 영원한 지옥이 되고야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화산 주변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은 존재했다. 바누아투의 다나섬 아수르 화산, 인도네시아 자바섬 수메르 화산, 과테말라의 푸에고 화산 아래에는 그곳을 떠나지 않고 활화산과의 불안한 그런 삶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들 있었다.

나는 왜 화산아래에서 사는 것일까.


늘 이런 의문을 되뇌며 그들은 살아가지만 화산이 주는 치명적인 상처만큼이나 놀라운 회복력을 선사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들은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용암과 화산재가 휩쓸고 뒤덮은 산아래 지역들은 시간이 지가면서 비옥한 땅으로 회생되어 커피 등 풍족한 산지 농산물을 제공해 주었다. 분화가 멈춘 분화구에는 빗물이 고여 거대한 호수가 되어 어부들에게 물고기를 아낌없이 누어 주었다.


아무리 척박하더라도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며 사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었다. "신이 우리를 창조한 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에 만족하고 나머지는 산꼭대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산을 올라가는 이들에게 맡겨버리기, 이는 매우 현명한 선택이고 인생의 모든 따뜻함을 향유하는 일"이라는 페소아의 글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산을 움직인다는 믿음으로 활화산처럼 열정적으로 모든 것을 쏟아내고 뿜어내며 오늘을 살아간다. 에릭 호퍼는 열정적인 정신상태는 많은 경우 기술이나 재능, 역량이 부족하다는 증거라고 했다. 활화산 같은 격렬한 열정이란 숙련이나 역량을 통해 생겨나는 자신감이 부족할 때 그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수련된 장인은 여유롭게 일하며 노는 것처럼 일해도 확실하게 임무를 완수해 낸다. 반면에 기술에 자신이 없는 장인은 마치 전 세계를 구할 것처럼 힘으로 밀어붙이고 또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뭐라도 이루어 낼 것이라 여긴다.


산을 움직이는 기술이 있다면 산을 움직인다는 믿음도, 열정도 필요하지 않다.


삶 속에서 욕망이 꿈틀거리며 활화산처럼 일렁일 때마다 우리의 일상이 요동치고 평범함의 가치가 흔들리는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럴 때면 가만히 주문처럼 외워본다. 산을 움직이는 것은 열정도, 믿음도 아니다. 그저 산을 움직이는 기술이 필요할 뿐이라고.

산을 움직이는 기술이란 무엇일까. 시간을 들여 현실을 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장인이 오랜 시간 숙련의 시간을 통해 단련하듯이 내 몸속으로 기술이 쌓이는 그 시간들의 흐름을 패배자처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영혼의 눈이 먼 채로 사막 한가운데 쓸모없이 고립되어 승리를 거두는 것보다는 꽃의 아름다움을 아는 패배자가 되는 편을 선호한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삶이, 삶을 창조한 신보다 좋다. 신이 내게 주었으니 이것이 내가 살아갈 삶이다. 진실보다 현실을 선호한다는 그의 글이 가슴 떨리게 나는 너무나 좋고 위안이 된다.

평범이 내 집같이 편안해지고

일상이 엄마의 품처럼 따스해지는 순간이면

믿음도, 열정도 필요 없이 산이 직이는 기적이 마법처럼 펼쳐진다.


이 밤, 나의 분화구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고 평온한 순간이 드리우는 그런 기적을 꿈꾸려 이제 그만 나의 잠자리를 보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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